며칠 전부터 우리 집으로 이어지는 좁고 짧은 길에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작은 곤충 몇 마리가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더니, 곧이어 웅웅거리는 날갯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가는 벌이겠거니 했지만,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따라붙고 맴도는 위협적인 움직임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다.
호기심 반, 걱정 반으로 주변을 살펴보다가 마침내 침입자의 본거지를 발견했다. 바로 적산전력계 상자 밑에, 회색 종이로 감싼 듯한 제법 큰 말벌 둥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둥지 아래쪽 작은 구멍으로는 말벌들이 분주하게 드나들고 있었다. 마치 작은 공항처럼 활기찼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말벌이 위험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1) 공격성이 매우 강해서 소리, 진동, 혹은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공격할 수 있다.
(2) 벌침을 여러 번 사용할 수 있어 꿀벌보다 훨씬 위험하다.
(3) 말벌 독에 과민한 사람은 전신 쇼크를 일으킬 수 있다.
(4) 둥지 근처를 지나가기만 해도 공격받을 수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말벌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은 둥지가 집 가까이에 있을 경우 현실적으로 어렵고 위험하다. 따라서 전문 업체의 도움을 받아 제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한다. 저녁 산책길에 쏘일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드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집에 말벌 퇴치제가 없어, 임시방편으로 집에 있던 WD-40(방청용 화학 약품)을 뿌려 보았다. 고약한 냄새에 말벌들이 질식하거나 도망치기를 기대하며.
다음 날 새벽,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둥지 근처를 다시 찾았다. 혹시 말벌 사체가 흩어져 있을까 싶어 살펴보았지만, 웬걸. 사체는커녕 말벌들은 전날보다 더 힘차게 둥지를 드나들고 있었다. “이런, 내가 뿌린 게 살충제가 아니라 영양제였던 걸까?”
말벌 둥지 옆의 길은 우리 집만 사용하는 통로라 다른 이웃의 도움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혼자 해결해야 하나 고민도 잠시, 말벌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콘도 단지 관리인에게 전화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살짝 과장해서 설명하며, 둥지를 급히 제거해 달라고 요청했다.
중간에 한 번 더 독촉 전화를 하고 나서야, 거의 한 시간 후 관리인이 나타났다. 그의 복장을 보자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온몸을 감싼 방호복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최소한 긴 옷으로 몸을 가려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는 반팔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말벌 제거용 약품 깡통 하나를 들고 있었다. “벌에 쏘이면 큰일 난다”고 조심하라고 하자, 듣기 싫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말벌 둥지 입구를 겨냥해 약품을 분사하자 말벌 몇 마리가 기어나오다가 바로 둥지 밑으로 떨어졌다. 몇 마리는 도망치려 날아올랐지만, 그가 정확히 조준해 뿌리니 한 마리도 남김없이 떨어졌다.
말벌 소탕 작전이 끝난 뒤에도 몇 마리가 둥지 주변을 날았지만, 오후가 되자 그것마저 사라지고 길목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떨어진 말벌 둥지를 보니, 사체가 즐비했고, 둥지는 마치 구겨진 종이 뭉치 같았다.
말벌 제국을 멸망시킨 데에 뿌듯함도 있었지만, 마음 한편이 씁쓸했다. 자연과 인간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자연이 인간의 삶을 위협할 때는 불가피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달랬다.
(2025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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