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나이 들어가니 걱정거리는 늘고

삼척감자 2023. 5. 2. 21:23

아침 산책길에서 자주 만나는 시(Shi)할머니는 중국 태생이고, (Chu)할머니는 대만 태생이다. 두 분 모두 84세로 동갑인데, 공교롭게도 생년월일조차 똑같으니 무슨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두 분은 같이 다닐 때가 많고 거의 매일 아침 함께 산책한다. 아침마다 팔을 앞뒤로 힘차게 휘두르며 4 Km가 넘는 거리를 걸으니 그 나이에 참 대단한 일이다. ‘할머니는 20여 년 전 바람피우던 남편을 내쫓았고, ‘할머니는 오래 전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지만, 두 분은 시도 때도 없이 오가며 외로운 사람끼리 서로 의지하며 지낸다.

 

며칠 전 아침에 할머니 혼자서 산책하기에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분은 다리가 아파서 그날은 걷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좌골신경통으로 다리가 아파서 걷다가 말고 쉬던 참이라 아픈 다리 얘기를 시작으로 오랜만에 대화가 제법 길어졌다.

 

요즘 들어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어. 며칠 전에도 자동차 키를 트렁크에 둔 채 잠가버려서 낭패를 봤지 뭐야. 다행히 보조 키를 할머니 집에 맡겨 두었기에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었어. 이거 치매가 아닌지 몰라. 정말 걱정이야.”

치매는 무슨? 그냥 건망증일 겁니다. 나이 들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요.”

나이 드니 혼자 사는 게 외로워. 자주 슬픔에 빠지기도 해. ‘가 가까이 사니 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친구에게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자식들을 멀리서 살고. 걱정이야.”

할머니와 가까이 지내며 서로 외로움을 달랜다지만, 그래도 옆구리가 시리다는 얘기였다.

 저도 나이 드니 종종 그렇답니다. 그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생각하세요.”

 

헤어진 남편이 바람피우던 여자와 재혼하여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는데, 두어 해 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전 남편이 다시 합쳐서 살자고 제의했지만, “내가 다 늙어서 당신 병시중하며 살아야 하겠느냐?”고 쏘아붙였더니 다시는 연락이 없더라고 했다. 머지않아 세상을 떠날 수도 있는 전 남편과 다시 합칠 생각은 전혀 없다고 했다. 어쩌다 제법 긴 대화를 나누며 할머니의 하소연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짜증스럽기도 했다. 외로운 대신 자유로우니 그걸 즐기며 사시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눌러서 참았다. “넌 마누라가 있으니 그런 소리나 하지.”라며 핀잔줄 게 뻔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이 어리고 미모가 그리 떨어지지 않는 아주머니가 그런 하소연을 했더라면 제법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고 갔을 테고, 외로움을 달래는 구체적인 처방도 줄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쉬웠다. 적지 않은 내 나이를 깜빡 잊고 엉뚱한 생각에 잠시 빠져 보았지만, 가끔은 그런 공상에 빠져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나이 들어 간다고 점점 나빠질 건강 걱정, 의료비 걱정, 배우자와 사별하고 혼자서 살 걱정 등, 더 나이 들며 닥칠 이런저런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하며 속앓이를 한다면 사람이 어찌 살겠나?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건 없을 텐데.

 

순자(筍子)에 복막장어무화(福莫長於無禍)라는 말이 나오는데, 莫은 더는 ~한 것이 없다라는 뜻이고, 長은 좋다라는 뜻이니, 莫長은 더 좋은 것이 없다라는 뜻이니, 이 말은 근심이 없는 것이 최고의 복이다라고 풀이된다고 한다.

 

근심과 걱정에 관한 통계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40%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가지고 근심한다고 한다. 되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일에 관해서 걱정하는 사람은 30%이며, 불필요한 건강 걱정이 12%이고, 생각하나 마나 한 잡동사니 걱정이 10%인데 반해 정말로 근심해야 할 일을 근심하는 경우는 8%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근심 걱정에 사로잡히는 게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안 되는 걸 알 수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근심하지 말고 나만 바라봐라고 말씀하시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인가?

 

(2023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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