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22

꿈에서 만난 친구, 그리움으로 남다

어제 새벽, 중학교 동창생인 Y를 꿈에서 보았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세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중학교 시절, 그는 잘생긴 학생이었다. 나도 그랬다.그는 공부도 잘했다. 나도 그랬다.사실은 내가 조금 더 잘했지만, 시골 중학교에서의 성적 차이라 해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당연히 우리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따라갈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책을 낭독할 때 마치 라디오 드라마의 성우처럼 멋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K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언론계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잠에서 깨어 지난 일을 되짚어 보았다.몇 년 전, 아마도 10여 년쯤 되었을까. 친구를 통해 그와 연락이 닿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

시간여행 2025.06.16

품의서와 을의 기억

50년 전, 회사에 처음 입사하자 한 선배 사원이 사내에서 사용되는 각종 문서 작성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이건 기안 A, B지(紙), 이건 통신 A, B지, 이건 기획 용지…”그렇게 다양한 문서의 작성 방식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타 부서에 보내는 통신문부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문서 작성에 숙달되자, 이번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상급자를 거쳐 중역의 결재를 받는 품의서 작성법을 배웠다. 품의서는 조직 내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작성하는 공식 문서로, 회사나 공공기관 등에서 업무 관련 의사 결정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 주된 목적은 상급자나 관련 부서의 승인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 필요한 배경 정보와 사유를 명확히 전달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책임..

시간여행 2025.06.11

아까시꽃이 필 때

한국에서 흔히 보이는 '아카시아'는 미국 원산의 "아까시나무"로, 호주 원산의 아카시아와는 다른 식물이다. 실제로 아까시나무에서는 하얀꽃이 피고 아카시아에서는 노란꽃이 핀다. 아까시나무의 꽃은 향기가 강하고 냄새가 좋다. 우리 집 주위에도 아까시나무가 몇 그루 눈에 띄었다. 고향 읍내를 가로 질러 흐르던 오십천변에 흔히 보이던 아까시 나무가 생각이 나서 잠시 추억에 잠겼다. 그 당시에 누님이 다니던 고등학교 축대에 아까시 나무가 많았고, 오십천변에도 많아서 지금 이맘때 꽃이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릴 때는 나무 아래에 서기만 해도 향기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초등학교 5, 6학년 때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누군가가 오십천변에 아까시꽃이 만발했다며, 바로 거기로 가서 꽃지짐이를..

시간여행 2025.05.09

오랜만에 친구의 소식을 듣고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J의 소식을 들었다.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그의 아내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9년 전, 뇌일혈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 계속 투병해왔지만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친구들에 대한 기억조차 거의 잊은 상태라며, 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던 단체 친목방에서 부득이하게 탈퇴하겠다는 소식이었다.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내 바로 뒤, 한 칸 건너 자리에 앉아 있어 1년 내내 가까이서 지냈다. 잘생긴 얼굴에 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한 표정이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다. 영어 시간에 교과서를 읽으면, 하와이에서 교환교수로 다녀온 경험이 있는 원어민 발음에 익숙한 선생님도 그의 발음을 칭찬할 정도였다. 억양이 정확..

시간여행 2025.04.25

WC가 워싱턴대학교라고요?

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60년 대에 강원도 시골에서는 화장실을 변소, 뒷간, 작은집 정낭, 통시 등으로 불렀다. 이런 단어만 들어도 작은 직사각형 구멍 아래로 쌓인 대변 덩이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던 재래식 시골 변소가 연상된다. 대개 집에서 좀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대개는 전등마저 없어서 밤에는 혼자 볼일 보러 가기가 무서웠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바닷가 마을인 M 읍의 중학교에 전학하니 읍내 여러 업소의 변소에서 가끔 부서질 것만 같은 문짝에 쓰인 W. C. 라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정자체가 아니고 삐뚤빼뚤 페인트로 쓴 글씨가 아래쪽으로 번지기까지 했으니, 변소라는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셈이었다. 그 뜻을 몰랐어도 지저분한 주변, 향기롭지 못한 냄새로 은밀한 일을 해결하는 곳이..

시간여행 2025.03.15

김원국 선생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원국 선생님 생각이 떠올랐다. 학년말쯤에 그분이 군에 입대한다고 떠난 후 본 적이 없으니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내 기억에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의 그분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내 기억력에 구글 검색 기능을 더하여 그 당시의 기억을 재구성해 본다.   선생님은 4학년인 시골 아이들 앞에서 가끔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정을 넣어서 읽어주고 학생들에게도 따라 읽게 하곤 했지만, 그 시들, 그것도 교과서에 실린 동시도 아닌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지금도 어느 날 칠판에 적어준 ‘내 소녀’란 시가 생각난다. ‘박사’란 낯선 단어와 ‘내 소녀’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구글에서 시의..

시간여행 2024.08.25

안드레아야, 잘 가라

며칠 전 초등학교 때 친구인 미카엘에게서 천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어릴 적에 강천규라는 이름보다는 강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신앙심이 깊은 친구였다. 몇 년 전에 연락이 닿아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던 어느날 “손자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가슴이 울컥해진다.”라고 이메일에 쓴 그의 말이 생각났다. 어릴 적에 성당에서 여성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던 어머니와 함께 성당 구내의 작은 집에 살던 그는 아버지가 한국동란 중에 납치되어 실종된 후 홀로 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기에 늘 외로움을 탔나 보았다. 몇 년 전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어릴 적에 바로 옆집에 살던 민 안드레아네 가족이 올망졸망한 아이들(8남매)로 시끌벅적하던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라던 그의 ..

시간여행 2024.02.17

도둑일까 손님일까

우리 집에 도둑이라는 손님이 든 게 40여 년 전, 내가 막 서른 살을 넘었을 때였다. 당시 L 전자의 초임 관리자로서 충청, 전라 지역 여섯 개 서비스 센터를 책임지며 대전에 본부를 두고, 충주, 청주, 전주, 광주 그리고 순천에 있는 서비스 센터와 곳곳의 대리점을 틈나는 대로, 아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방문하며 바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출장 일수가 백일이 넘었으니, 갓난아기인 큰딸이 자라는 것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일 년 내내 휴일도 없이 동서남북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큰딸과 두 살 터울로 작은딸을 만들었으니, 3년 동안 두 딸을 낳기만, 아니 만들기만 했지, 보살필 줄을 모른 무심한 아비였다는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은 대지와 건물이 넓어서 휑뎅그렁했다..

시간여행 2023.08.29

41년 전 오늘 밤

41년 전 오늘 밤 주재원으로 발령받고 JFK Airport에 도착했다. 주재원 발령을 승진 이상으로 여기던 때라, 다들 그만하면 강원도 촌놈이 출세했다고 했지만, 출세는 개뿔! 그날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날이었다. 한국에서 70여명 직원을 거느리고 출세한 듯 착각하며 지내던 좋은 세월은 끝나고 현지 채용한 여직원 딸랑 네 명만 모시고 일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는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에서 지내며 충성심 강한 직원들 덕분에 편히 지내다가, 잘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월세 아파트를 구하려니 후회가 밀려 왔다. “괜히 왔구나.” 그로부터 3개월 후 아내와 두 딸이 내 뒤를 따라 미국에 입국했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두 딸은 각각 한..

시간여행 2022.12.11

특허 분쟁에 대처할 자료를 찾으러

내가 금성사 특허부서에서 일하던 시기(1974~78)에는 특허 분쟁에 대처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는 있지도 않았고, 큰 회사나 정부 기관에 메인 프레임 컴퓨터가 한 대 설치되어 컴퓨터 전문가나 그걸 다룰 수 있던 시절이어서 자료 조사는 오로지 문서를 수작업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특허(실용신안)를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는 (1) 산업상 이용 가능성 (2) 신규성 (3) 진보성 등 세 가지가 있는데, 특허 무효심판 청구나 이의신청에서는 신규성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신규성 상실을 증명하려면 특허 출원 이전에 그 발명이 공지(公知), 공용(公用)되었음을 입증할 증거 자료를 제시해야 했다. 그런 자료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특허청 자료실에 자주 가야 했다...

시간여행 2022.09.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