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17

김원국 선생님

오늘 아침에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원국 선생님 생각이 떠올랐다. 학년말쯤에 그분이 군에 입대한다고 떠난 후 본 적이 없으니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내 기억에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의 그분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내 기억력에 구글 검색 기능을 더하여 그 당시의 기억을 재구성해 본다.   선생님은 4학년인 시골 아이들 앞에서 가끔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정을 넣어서 읽어주고 학생들에게도 따라 읽게 하곤 했지만, 그 시들, 그것도 교과서에 실린 동시도 아닌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지금도 어느 날 칠판에 적어준 ‘내 소녀’란 시가 생각난다. ‘박사’란 낯선 단어와 ‘내 소녀’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구글에서 시의..

시간여행 2024.08.25

안드레아야, 잘 가라

며칠 전 초등학교 때 친구인 미카엘에게서 천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는 어릴 적에 강천규라는 이름보다는 강 안드레아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 신앙심이 깊은 친구였다. 몇 년 전에 연락이 닿아 그간의 소식을 주고받던 어느날 “손자가 할아버지 하고 부르면 가슴이 울컥해진다.”라고 이메일에 쓴 그의 말이 생각났다. 어릴 적에 성당에서 여성 전교회장으로 활동하던 어머니와 함께 성당 구내의 작은 집에 살던 그는 아버지가 한국동란 중에 납치되어 실종된 후 홀로 된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기에 늘 외로움을 탔나 보았다. 몇 년 전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어릴 적에 바로 옆집에 살던 민 안드레아네 가족이 올망졸망한 아이들(8남매)로 시끌벅적하던 게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라던 그의 ..

시간여행 2024.02.17

도둑일까 손님일까

우리 집에 도둑이라는 손님이 든 게 40여 년 전, 내가 막 서른 살을 넘었을 때였다. 당시 L 전자의 초임 관리자로서 충청, 전라 지역 여섯 개 서비스 센터를 책임지며 대전에 본부를 두고, 충주, 청주, 전주, 광주 그리고 순천에 있는 서비스 센터와 곳곳의 대리점을 틈나는 대로, 아니, 일부러 시간을 내서 방문하며 바쁘게 지내던 시절이었다. 일 년에 출장 일수가 백일이 넘었으니, 갓난아기인 큰딸이 자라는 것도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일 년 내내 휴일도 없이 동서남북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큰딸과 두 살 터울로 작은딸을 만들었으니, 3년 동안 두 딸을 낳기만, 아니 만들기만 했지, 보살필 줄을 모른 무심한 아비였다는 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린다.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은 대지와 건물이 넓어서 휑뎅그렁했다..

시간여행 2023.08.29

41년 전 오늘 밤

41년 전 오늘 밤 주재원으로 발령받고 JFK Airport에 도착했다. 주재원 발령을 승진 이상으로 여기던 때라, 다들 그만하면 강원도 촌놈이 출세했다고 했지만, 출세는 개뿔! 그날이 바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 날이었다. 한국에서 70여명 직원을 거느리고 출세한 듯 착각하며 지내던 좋은 세월은 끝나고 현지 채용한 여직원 딸랑 네 명만 모시고 일하기 시작한 날이 바로 그날이었다. 미국에 오기 직전까지는 회사에서 제공한 사택에서 지내며 충성심 강한 직원들 덕분에 편히 지내다가, 잘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월세 아파트를 구하려니 후회가 밀려 왔다. “괜히 왔구나.” 그로부터 3개월 후 아내와 두 딸이 내 뒤를 따라 미국에 입국했다. 그때 나는 서른두 살, 꽃다운 나이였고, 두 딸은 각각 한..

시간여행 2022.12.11

특허 분쟁에 대처할 자료를 찾으러

내가 금성사 특허부서에서 일하던 시기(1974~78)에는 특허 분쟁에 대처하기 위한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는 있지도 않았고, 큰 회사나 정부 기관에 메인 프레임 컴퓨터가 한 대 설치되어 컴퓨터 전문가나 그걸 다룰 수 있던 시절이어서 자료 조사는 오로지 문서를 수작업으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특허(실용신안)를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요건으로는 (1) 산업상 이용 가능성 (2) 신규성 (3) 진보성 등 세 가지가 있는데, 특허 무효심판 청구나 이의신청에서는 신규성이 가장 문제가 되었다. 신규성 상실을 증명하려면 특허 출원 이전에 그 발명이 공지(公知), 공용(公用)되었음을 입증할 증거 자료를 제시해야 했다. 그런 자료를 찾으려면 아무래도 특허청 자료실에 자주 가야 했다...

시간여행 2022.09.07

음치로 살아가기

어릴 적부터 별로 신통치 않던 내 노래 실력이 변성기를 거치며 엉망이 되어 버렸다. 고등학교 때는 가창으로 치르던 음악 시험에서는 늘 반에서 유일하고도 최하인 점수, 55점을 받아서 석차를 떨어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회사에 입사하고는 회식에서는 밥 먹기, 술 먹기가 대강 끝나면 으레 노래판이 벌어졌는데 그때마다 참 곤혹스러웠다. 내 순서가 지나가기를 바라며 일없이 화장실을 들락거리기도 했지만 영악한 동료는 나를 빠뜨리는 일이 없이 한사코 내 노래를 들으려고 했다. 맨정신에 노래하기란 어려워서 노래 부를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연방 술을 들이켜기도 했다. 어렵게 노래를 부르면 듣고서 웃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만 빼놓고. 그럴 때마다 마음이 상해서 밥 잘 먹고 좋은 분위기에서 잘 놀다가도 기분이 엉망..

시간여행 2022.09.06

옛날에 금성사 특허과에서

거의 50년 전 내 신입사원 시절에 업무부에서 특허 업무를 담당할 때 얘기니까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다. 그때는 곰이 마늘을 먹고 100일 동안 동굴에서 웅크리고 있으면 예쁜 여자가 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다던데 나는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아래 이야기는 내가 실제로 겪은 이야기이니 신화가 아니고 금성사 역사의 일부가 되겠다. 그 당시에는 산업 재산권법(특허법, 실용신안법, 상표법, 디자인 보호법)과 관련 법령이 일본 것과 같았다. 금성사의 직무 발명 보상 규정도 히타치 걸 거의 그대로 번역해서 만들었다. 언젠가 특허국(몇 년 후 특허청으로 승격됨)에서 실시하는 교육에서 어느 강사가 “우리 법령이 일본 것과 같은데 어느 나라가 베꼈는지는 모르겠지만, 참 기막힌 우연의 일치입니다”라며 쑥..

시간여행 2022.09.06

옛날 서비스 차량 운전기사 이야기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는 자동차 운전도 특별한 기술이라고 여겼다. 자동차를 다루는 운전기사들은 전기 전자 제품을 수리하는 서비스맨들을 데리고 다니며 은근히 세도를 부리기도 하고, 꼬장을 부리기도 해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회사에서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비스맨들이 운전하는 걸 권장하는 뜻에서 운전면허를 취득한 서비스 기사들이 운전할 경우 운전 수당을 지급했다. 그랬더니 겸임 운전기사들이 운전 미숙으로 사고를 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전업 운전기사들이 그걸 노골적으로 즐길 뿐만 아니라 불난 데 부채질까지 해대어서 늘 양 집단 간의 불화가 있었다. 공고 출신인 서비스맨들은 학력이 그보다 낮은 전업 운전기사들을 ‘배우지 못한 놈들’이라고 멸시했고, 운전기사들은 겸업 서비스맨들이 자신들의 밥..

시간여행 2022.09.06

쓸데없이 돈을 쓰다니

한국에서 생산한 제품이 미국에서 판매된 후 고장 나서 서비스 신청하기 까지 얼마 정도의 기간(이하 ‘초기 고장 소요 기간’이라 함)이 걸릴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크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다. 제품 보증(Warranty) 기간을 정할 때 다소 참고할 수는 있겠지만, 업계의 동종 제품에 대한 관행을 기준으로 해서 회사 판매 정책에 따라 다소 늘리거나 줄이면 되지 초기 고장 소요 기간이 그리 중요한 건 아니다. 고장 발생 비율이나 서비스용 부품을 주문할 때도 초기 고장 소요 기간이 그다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지는 않는다. 35년 전 뉴저지 현지 법인의 어느 분이 초기 고장 소요 기간에 관하여 묻기에 6개월이며, 산출 근거는 서비스 카드에 적힌 내용에 따라 샘플링해서 계산한 결과를 사사오입하면 6개월이라는 결과..

시간여행 2022.09.05

술이라도 잘 마셨으니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에서 목자(目子)가 불량(不良)하다”라는 표현을 가끔 볼 수 있다. 목자는 눈의 비속어로서 ‘눈깔’ 정도로 옮기면 되겠다. 젊은 나이에 서비스 과장으로 임명되어 대전에서 근무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내니 그야말로 ‘눈깔 굴리는 게 불량스러운’ 직원 둘이 눈에 거슬렸는데 둘 다 나보다 나이가 여러 살 위였다. 한 사람은 운전기사였는데 군대에 있을 때 장군의 차를 몰았다는 걸 대단한 자랑으로 여기며, 일도 없이 내 방에 들어와 여직원들에게 곱지 않은 말을 내뱉는 게 나에게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다른 직원은 사무직원이었는데, 친형이 본사의 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걸 대단한 빽이라고 과시하며 센터장에게 반말을 내뱉으며 거칠게 굴었다. 센터장도 이 두 친구가 직원들을 선동하여 분..

시간여행 2022.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