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오랜만에 친구의 소식을 듣고

삼척감자 2025. 4. 25. 22:23

아주 오랜만에 고등학교 동창인 J의 소식을 들었다. 본인에게서 직접 들은 것은 아니고, 그의 아내를 통해 전해들은 이야기였다. 그런데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9년 전, 뇌일혈로 건강에 이상이 생긴 이후로 계속 투병해왔지만 상태는 점차 악화되었고, 최근에는 친구들에 대한 기억조차 거의 잊은 상태라며, 친구들이 함께 운영하던 단체 친목방에서 부득이하게 탈퇴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그는 내 바로 뒤, 한 칸 건너 자리에 앉아 있어 1년 내내 가까이서 지냈다. 잘생긴 얼굴에 늘 어딘가 우수에 잠긴 듯한 표정이어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었다. 영어 시간에 교과서를 읽으면, 하와이에서 교환교수로 다녀온 경험이 있는 원어민 발음에 익숙한 선생님도 그의 발음을 칭찬할 정도였다. 억양이 정확하고 또렷했다. 경상남도에서 유학 와 누나와 함께 지내던 그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는지, 학업에만 집중하기 어려워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어느 날, 내가 뉴저지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일이다. 출장자를 데리러 공항에 나간 김에 시간이 남아 항공사 터미널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는데, 당시 대기업의 미주 지역 책임자로 부임했다는 J가 눈앞에 나타났다. 세월이 흘러 다소 나이 들어 보였지만, 나는 단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 “반갑네, 나 1학년 때 한 반이었던 형기야!” 하고 악수를 청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몇 마디 어색한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그는 나와 관련된 기억의 실마리를 끝내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명함만 주고받고 맥없이 돌아섰지만, 내심 무척 섭섭했다.

며칠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로 통화를 시작했고, 가족 이야기를 나누다가 조만간 식사라도 함께 하자며 통화를 마쳤다. 당시 그는 뉴욕 시내에 살았고, 나는 허드슨강을 건너 뉴저지 북부에 거주하고 있었다. 밥 한 끼 먹자고 서로 먼 걸음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앨라배마 주의 부서로 전근을 가게 되었고, 그는 총괄 사장으로 승진한 뒤 귀국했다. 결국 "밥 한 번 같이 먹자"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의 아내의 글에 따르면, 그의 건강은 회복되기는커녕 더욱 나빠지고 있다고 한다. 나이까지 감안하면, 이제는 회복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나와 밥 한 번 같이 먹자는 약속도 이미 그의 기억 속에서는 사라졌겠지.

하지만 J, 나는 아직도 그 약속이 유효하다고 믿고 있네. 밥을 함께 먹지 못하더라도 얼굴 한 번이라도 보면 더 바랄 게 없겠지만, 교통사고 이후 해외여행이 여의치 않은 내게는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네. 힘들더라도 부디 건강 잘 챙기고, 편안히 지내길 바란다네.

(친구의 사적인 상황을 고려하여 실명, 회사명, 구체적인 직위 등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글을 읽는 친구들은 모두 그가 누구인지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2025년 4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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