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

김원국 선생님

삼척감자 2024. 8. 25. 02:07

오늘 아침에 갑자기 초등학교 4학년 때 담임이었던 김원국 선생님 생각이 떠올랐다. 학년말쯤에 그분이 군에 입대한다고 떠난 후 본 적이 없으니 60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내 기억에는 호리호리한 몸매에 날카로운 인상의 그분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내 기억력에 구글 검색 기능을 더하여 그 당시의 기억을 재구성해 본다. 

 

선생님은 4학년인 시골 아이들 앞에서 가끔 시를 칠판에 적어놓고 감정을 넣어서 읽어주고 학생들에게도 따라 읽게 하곤 했지만, 그 시들, 그것도 교과서에 실린 동시도 아닌 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아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지금도 어느 날 칠판에 적어준 내 소녀란 시가 생각난다. ‘박사란 낯선 단어와 내 소녀라는 단어가 생각나서 구글에서 시의 전문을 찾아서 음미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70대 할아버지가 된 나의 감성과 맞지 않는다.

 

소녀(少女)

 

 가지에 바구니 걸어 놓고

소녀 어디 갔느뇨

 

............

 

박사(薄紗) 아지랑이

오늘도 가지 앞에 아른거린다.

 

오일도(吳一島)  소녀(少女) (1935년 발표)

 

아마도 문학에 푹 빠져있던 청년이었기에 늘 대하던 어린 학생들에게도 자신의 느낌을 나누고 싶어 했던 걸로 생각되지만, 그게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렇게 그때 들은 시를 아직도 기억하는 할아버지가 있으니 말이다.

 

선생이 학생들을 특별한 이유 없이 동네북 취급해서 마구 때리던 그 시절에도 그 선생님은 매를 들었던 기억이 없다. 언젠가 수업 중에 고약한 장난을 치던 놈을 교탁 옆으로 불러내어서는 체벌 대신 파우스트 얘기를 해 주었다. 늘 정신을 똑똑히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줄 목적으로 아마도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정복한 자만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이 자유로운 곳에서 자유로운 민중들과 함께하리라. 이 순간에 말하리라. 멈추어라!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메피스토가 드디어 목적이 이뤄졌다고 믿으며 영혼을 데려가려는 찰나 천사들이 내려와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하며 메피스토와 악마들을 무찌르고 파우스트의 영혼을 구원한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그레트헨을 다시 만나게 된다.”

 

벌받으려고 불려 나간 그 아이는 물론 나 같은 모범생도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 파우스트라는 이름과 멈추어라!”라는 말은 깊이 새겨졌다. 체벌 대신 파우스트 얘기를 들려준 그 선생님은 정말 멋있는 분이었다. 어쩌다 선생님 하숙방에 초대받은 학생들에게는 손수 사과를 깎아 주기도 하고, 서양 화투라는 카드놀이(트럼프라고 불렀다)도 가르쳐 준 그분은 학생들을 정말 사랑한 분이었다.

 

점심시간이면 교탁 옆에 마련된 책상에서 점심을 하셨는데. 가끔은 반 대표 가수인 김성집이를 불러내어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를 시키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감상하던 로맨틱한 분이었다.

 

어린 학생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할 카뮈의 이방인을 비롯한 여러 문학 작품을 소개해 주던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과는 매우 다른, 조금 이상한 분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아이들은 그 선생님을 좋아하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 선생님이 우리 집을 갑자기 방문하여 며칠 내로 군에 입대하게 되어 바로 떠난다는 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급히 촌지를 챙겨서 드리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며 황급히 떠났다. 촌지 주고받기가 일반화되어 있던 그 시절에 촌지를 거절하던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에 어머니는 놀라셨다.

 

그러고 세월이 60여 년이나 흘렀지만, 그 이후 선생님을 다시 만난 적은 없다. 살아 계신다면 지금 아흔 살 가까이 되었을 거다. 혹시 이 글이 그분에게서 연락을 받는 계기가 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바랄 수 없는 일이겠다. 대표 가수인 김성집이도 초등학교 졸업 후 어디론가 떠났다니 그에게서 연락을 다시 받기도 어려울 듯하다.

 

(2024 8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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