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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ng, 나이 듦의 법칙

집 둘레길을 산책하다가 외출에서 돌아오는 지그(Zyg) 영감을 만났다. 여든한 살인 그는 해병대 출신이다. 한때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당당한 풍모를 자랑했는데, 오랜만에 본 그의 모습은 딴사람 같았다. 몸이 눈에 띄게 쪼그라들어 나보다 훨씬 커 보이던 키마저 이제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요즘 왜 그리 보이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심장에 문제가 생겨 걷는 것조차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별일 아니라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It's just aging.” 그냥 나이 들어서 그런 거라는 뜻이다. 그의 옆 건물에 사는 빌(Bill)도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일흔세 살인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배가 불룩하고 콧수염을 기른 풍채가 제법 그럴싸했다. 분장용 옷만 제대로 걸치면 ..

미국 생활 2026.10.30

정치적 풍자가 보여 준 한미 사회의 현실

우리 동네 사랑방 역할을 하는 소셜미디어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보았다. "11월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기면 하늘은 더 파래지고, 물은 수정처럼 맑아지며, 땅은 훨씬 비옥해진다는 소문이 있다." 민주당의 장밋빛 공약을 꼬집는 풍자였다. 평소 정치적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는 미국인들의 성향을 생각하면, 짧은 농담 하나에 400명 가까운 사람이 댓글을 달며 열띤 반응을 보인 것은 뜻밖이었다. 논쟁은 곧 트럼프와 공화당의 공약으로 번졌다. 물가와 기름값을 낮추고 전쟁을 끝내겠다던 약속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반문이 이어졌고, 집값과 의료비, 이민과 낙태 등 삶과 직결된 문제들도 도마 위에 올랐다. 미국에서는 정치인의 허풍과 공약 파기, 말 바꾸기를 풍자로 꼬집곤 한다. 풍자는 재치와 통찰로 권력의 허점을 드러내고..

이것저것 2026.10.28

손주를 먼저 낳았더라면

“If I had known how wonderful it would be to have grandchildren, I’d have had them first.” — Lois Wyse “손주가 이렇게 좋은 줄 알았더라면, 자식보다 손주를 먼저 낳았을 것이다.” 이 말을 남긴 로이스 와이즈(Lois Wyse)는 미국의 저명한 여성 광고인이자 작가였다. 그녀가 손주에 대해 남긴 이 한마디가 요즘 들어 자꾸 마음에 와닿는다. 딸들이 어릴 때는 정말 사랑스러웠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던 딸들과, 그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었던 부모의 관계는 굳이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딸이 웃으면 나도 웃었고, 딸이 아프면 나도 아팠다. 그런 딸들이 자라 고등학교에 가고 대학에 진학하며 조금씩 달라졌..

가족 이야기 2026.10.20

가게 문을 닫는다는 것

오랫동안 가까이 지내 온 분이 수십 년 동안 운영하던 가게를 곧 정리한다고 한다. 미국 이민 1세대들이 오랜 세월 일구어 온 가게들이 하나둘 문을 닫고 있다. 온라인 상거래의 확산과 소비 방식의 변화, 인건비와 임대료 상승 등 달라진 경영 환경을 견디기 어려워진 데다, 가게를 지켜 온 주인들도 고령에 접어들었다. 자녀들이 가업을 잇지 않는 경우도 많아 결국 평생 일군 가게를 정리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이는 단순히 가게 몇 곳이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이민 1세대가 미국에서 일구어 온 한 시대가 저물어 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내 지인도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 거래와 가격 경쟁에 밀려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놀면 뭐 하나” 하는 생각으로 소일거리 삼아 가게를 운영해 왔다. 그러나 나이가 ..

미국 생활 2026.10.19

내 마음 속 최고의 브랜드

몇 달 전부터 식기세척기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다. 푸시버튼을 눌러도 오작동이 심해 제대로 사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싸다고 덜컥 샀더니 6년도 채 되지 않아 이 모양이라니, 처음에 LG 제품을 사지 않은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마침 뉴저지 주정부에서 노인 대상으로 매년 10월에 지급하는 재산세 환급금이 은행 계좌로 들어왔다. 게다가 며칠 뒤에는 중간선거를 앞두고 트럼프 정부에서 의료비 보조 명목으로 약간의 지원금까지 입금되었다. 뜻밖에 약간의 공돈이 생기니, 오래된 가전제품부터 바꿔서 마님에게 점수나 좀 따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심 식기세척기, 가스레인지, 냉장고까지 모두 LG 제품으로 바꾸리라 마음먹고, 집 근처 가전 매장 웹사이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곧 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미국 생활 2026.10.16

코스트코에서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집 근처 코스트코에 들러 한국 라면 한 박스를 사 오곤 한다. 미국 매장 한가운데 한국 식품이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 뿌듯하기도 하고, 일반 한인 마트보다 가격도 싸기에 라면은 늘 이곳에서 챙기게 된다. 며칠 전,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병원에 다녀올 일이 있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예약 시간을 두 시간이나 일찍 잘못 알고 찾아간 것이었다. 갑자기 비어버린 두 시간 동안 무엇을 할까 하다가, 마침 근처에 있는 코스트코 매장이 눈에 띄었다. 떨어져 가는 라면과 계란도 살 겸 발길을 옮겼다. 늘 다니던 동네 매장은 통로 구석구석까지 눈에 익어 편했지만, 낯선 매장이라 그런지 라면 진열대를 찾기가 생각보다 난감했다. 결국 라면은 포기하고 계산대로 발길을 돌리던 중, 푸근한 인상의..

미국 생활 2026.10.13

잠이 먼저 깬 것일까, 소변이 먼저였을까

나이가 들면서 밤에 자다가 깨는 일이 잦아졌다. 예전에는 아침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자는 날도 있었는데, 이제는 한밤중에 한두 번, 때로는 두세 번 눈을 뜬다. 눈을 뜨면 화장실에 가고, 다시 누우면 잠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한참 뒤척이다 보면 어느새 아침이다. 분명 밤새 누워 있었는데, 아침이면 잔 것 같지도 않다. 얼마 전에도 자다가 깨어 화장실에 다녀온 뒤 한참 뒤척이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내가 소변이 마려워서 잠에서 깨는 것일까, 아니면 잠이 먼저 깨서 소변을 보러 가는 것일까? 소변이 방광에 가득 차서 나를 깨웠다면 억울할 것도 없다. 방광이 제 할 일을 한 것이니 말이다. 문제는 잠이 먼저 깬 경우다. 눈을 뜨고 나니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도 어려우니 화장실이나 다녀..

이것저것 2026.10.10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들의 세상

나는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를 두어 번 읽었고,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그레고리 펙이 주연)도 구해서 보았다. 소설이 전해주는 깊은 울림에 감명을 받아 주변 분들에게 책을 빌려주며 읽어보기를 권하기도 했으니, 이쯤 되면 나 스스로를 《앵무새 죽이기》의 오랜 애독자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소설 제목에 쓰인 '앵무새'의 실제 모델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앵무목에 속하는 화려한 깃털을 가진 반려조인 앵무새가 아니라 참새목(目)에 속하는 '흉내지빠귀(Mockingbird)'라는 새다. 그러니까 한국어로 번역하며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엉뚱한 새의 이름으로 번역된 것이다. 이 과(科)에는 약 30여 종이 넘는 새들이 속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것저것 2026.10.06

우리가 최고라는 착각

2년 전 아내를 여읜 성당 교우가 며칠 후면 고국으로역이민을 떠난다고 해서 점심을 함께했다. 내가 아는 이들 중 미국 직장보다 더 나은 대우를 약속받고 고국으로 돌아간 젊은이는 여럿 보았어도, 나이가 들어 역이민을 결정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식사하는 동안 그는 이전에 두어 달 한국에 머물며 느낀 고국의 발전상을 열정적으로 늘어놓았다. 그러다 문득 미국에서 한국으로 역이민을 간 사람이 백만 명이나 된다며, 그것이야말로 한국이 미국보다 살기 좋은 나라가 되었다는 증거라고 했다. 하지만 실제 통계를 보면 2023년 기준 미국 거주 한국계 인구는 약 183만 명이고, 그중 한국에서 태어난 이민자가 약 103만 명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출생 이민자 수를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으로 잘못 이해한 모양이었다..

미국 생활 2026.10.04

기억력 검사 앞에서

Medicare Annual Wellness Visit은 메디케어 가입자가 1년에 한 번 받는 예방적 건강관리를 위한 주치의 방문이다. 주치의가 전반적인 건강상태와 위험요인을 점검하고, 앞으로 필요한 예방검진과 건강관리 계획을 세우는 제도다. 며칠 전 중국인 여의사인 주치의를 만나 거의 한 시간 동안 건강 전반에 관한 점검을 받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좀 짜증스러웠다. 생긴 것부터 모범생 같은 의사는 한 항목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정해진 순서대로 하나하나 짚어가며 수많은 질문을 이어갔다. 내 옆에는 아내가 앉아 몸이 좀 부자유스러운 나를 돕고 있었다. 검사 항목 가운데 인지기능 검사도 있었다. 혹시 기억력 감퇴가 있는지, 치매 증상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검사다. 질문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 병원이 있는..

미국 생활 2026.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