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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의 후임자

40년도 더 지난 일이다. 회사 업무부에서 4년 동안 일하며 특허 업무에 겨우 익숙해질 무렵, 뜻밖의 인사 발령으로 중부지역 서비스 담당 과장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승진의 기쁨보다는 전혀 접해보지 못한 낯선 업무를 맡았다는 걱정이 훨씬 더 컸다. 지방에 내려가 근무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첫 정기 인사가 있었다. 당시 서비스 담당 과장은 모두 여섯 명이었는데, 그중 세 명이 자재 관리 부실과 업무 태만 등을 이유로 한꺼번에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같은 일을 하던 동료 절반이 해고되는 모습을 보며 비로소 그 분야의 살벌함을 실감했다. 서비스 업무는 예상치 못한 사고와 민원이 빈번해 늘 긴장해야 했고, 직원들의 실수까지 관리자의 책임으로 이어지곤 했다. 나훈아의 노래 「사내」 가사처럼 ‘조마조마, 긴가민가,..

시간여행 2026.08.31

설마가 현실이 될 때

얼마 전 같은 동네에 사는 한 미국인 여성이 인터넷에 올린 글을 읽었다. 내용은 쉽게 믿기 어려웠다. 유방 확대 수술을 받았는데,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정작 보형물은 넣지도 않은 채 봉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더 놀라운 기사가 떠올랐다. 언젠가 신문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한 환자가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수술이 끝나고 보니 의사가 멀쩡한 오른쪽 다리를 잘라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수술실에는 의사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간호사와 여러 의료진이 함께 있었을 텐데, 어떻게 아무도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을 접하면 ..

미국 생활 2026.08.29

허벅지에서 발끝까지 긴 지퍼가 달린 바지

의족을 처음 맞추어 다리에 끼웠을 때, 정작 나를 가장 끈질기게 괴롭힌 것은 걷는 연습이 아니었다. 뜻밖에도 매일 몇 번씩 마주하는 '바지를 입고 벗는 일'이었다. 새로 만든 의족은 생각보다 훨씬 두껍고 투박했다. 멀쩡한 다른 쪽 다리에 비해 부피가 크다 보니, 평소 입던 바지를 그냥 입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바지를 입으려면 먼저 바지 구멍으로 의족의 발 부분을 쑤셔 넣듯 밀어 넣은 뒤, 바지와 의족을 한 몸처럼 끌어올려 절단된 허벅지에 끼워 넣어야 했다. 벗을 때 역시 역순으로 허벅지에서 의족을 빼낸 다음, 바지 속에서 의족을 힘겹게 꺼내야만 했다. 매일 이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할 때마다 속에서 솟구치는 짜증과 씁쓸함은 어쩔 수 없었다. 남들의 시선에 혹시나 어색하게 보일까 마음을 졸이는 것도..

교통사고 이후 2026.08.26

수학과 씨름하던 대학 시절

전기공학을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해도, 수학 때문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줄은 몰랐다. 전기공학이라고 하면 전기회로, 발전기와 모터 같은 것들을 먼저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 들어가 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미적분학과 대수학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수학은 전기공학을 공부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전기공학을 공부하러 왔는데 왜 이렇게 수학을 많이 해야 하는가?” 대학 시절에는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그러나 수학 없이는 전기공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되었다. 전압과 전류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 알아내려면 미분방정식을 풀어야 했고, 회로이론에서는 복소수가, 전기자기학에서는 벡터와 벡터미적분이 필요했다. 신호와 시스템에서는 푸리에 변환과 라플라스 변..

시간여행 2026.08.24

1960년대 영어 수업과 40년의 미국 생활

오래전에 나온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은 내 고향 강원도를 무대로 하는 데다가 재미도 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았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미군 조종사 스미스(Smith)는 비행기가 산간 오지인 동막골에 추락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갇히게 된다. 그런데 마을 교사인 김 선생이 영어를 조금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영어독본'을 펼쳐놓고 그와 대화를 시도한다. 미국인을 생전 처음 보는 김 선생은 영어를 실제 상황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아니라, 교과서에 나온 대로 정해진 순서에 따라 주고받아야 하는 문답으로 생각했다. 김 선생은 “How are you?”라고 물으면 상대방이 “Fine, and you?”라고 답하고, 그걸 받아서 “I'm fine.”이라고 말하는 교과서식 대화가 순서대로 이..

미국 생활 2026.08.22

과학의 언어로 신을 읽는 일

'이 거대한 우주는 누가, 왜 만든 것일까?' 인류는 오랫동안 '신'이 그런 엄청난 일을 했다고 믿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원인의 고리 끝에는 '제1원인'이 존재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이작 뉴턴이 연구 발표한 운동의 법칙조차 원래는 신이 부여한 신성한 질서를 증명하려는 시도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역설적으로 '신이 존재하지 않아도 되는 우주관'으로 발전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뉴턴의 세 가지 운동 법칙은 사과의 낙하부터 행성의 회전에 이르기까지 우주 만물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오늘날 현대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우주는 신의 개입 없이도 정교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 고전 물리학과 양자역학은 비물질적인 힘이 물질계에 직접 개..

신앙 생활 2026.08.19

주보 제작의 애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는 내 삶을 뒤흔들어 놓았다. 몸에 장애를 안게 되었을 때, 세상이 멈춘 듯한 절망과 함께 찾아온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죽여야 한다’는 아득한 두려움이었다. 환갑을 두어 해 앞둔 나이에 세상의 변방으로 밀려난 듯했던 그때, 주임신부님께서 성당 주보 제작을 맡아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셨다. 사고 이후 교우들이 보내주었던 기도와 따뜻한 손길에늘 마음의 빚을 지고 있던 터였다. 내게 찾아온 그 소임은 그저 할 일이 생겼다는 반가움을 넘어, 공동체에서 받은 무거운 사랑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는 은혜로운 통로였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12년이라는 세월을 채웠다. 그동안 주보 제작 횟수는 600번 조금 넘고, 프린트한 페이지는 5,000쪽이 조금 넘는다. 그 기간에 제작한 주보는 모..

신앙 공동체 2026.08.17

나이 들어가니 귀도 나빠지고

미국에 처음 온 그 시절부터 무려 40여 년을 알고 지낸 P씨 부부에게서 얼마 전 반가운 연락이 왔다. 큰손자가 당당히 아이비리그 대학에 합격했다며, 기쁜 마음으로 밥 한 끼 대접으로 한턱내고 싶다는 소식이었다. 집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차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였지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먼 길조차 옛 추억을 되짚어가는 여정처럼 느껴졌다. 서른 살 전후의 젊은 시절, 같은 아파트에 살며 서너 살 남짓한 자식들을 키우면서 나누었던 애환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식사하고, 캠핑을 가고, 집 근처 공원과 놀이터를 누비고, 여러 관광지를 함께 찾아다녔다. 지나고 보니 그 모든 시간이 몹시 그립다. 한창 젊었을 때라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수시로 시간을 내어 온 가족..

미국 생활 2026.08.15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지난 주일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어느 교우에게서 새로 나온 영화 ‘오디세이’가 참 좋더라며 꼭 한 번 관람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러지 않아도 얼마 전부터 그 영화에 관한 소개와 감상평을 유튜브에서 보고 흥미를 느끼던 참이었다. 어저께 온라인으로 예매해 두고 오늘 체육관에 다녀오는 길에 극장에 들렀다. 모처럼 보는 대작에 온통 얼이 빠져버렸다. 이만한 작품을 한가한 시간대라고 할인받고(한국식 조조할인의 개념인 듯), 또 노인이라고 할인받아서 헐값에 관람하기가 미안할 정도였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스케일이 크다. 그리고 신과 인간이 대거 등장하여 소재가 다양하고 변화무쌍하다. 또한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영웅담이 많다. 아무리 신화라서 과장이 심하다지만, 우리의 신화와 영웅담이 그리스와 로마에 비할 바 ..

이것저것 2026.08.13

깨어났으나 아직 돌아오지 못한 시간

오래 전에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마친 후, 나는 한 달 가까이 인위적인 혼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세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온하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나는 아직 '이전의 나'로 돌아오지 못한 채였다. 의식은 돌아왔으되 정신은 여전히 짙은 안개 속에 잠긴 듯 몽롱했다. 사람들은 내가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며 안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나는 살아 있다는 실감조차 없었다. 귓가를 스치는 말소리는 바로 이해되지 않았고, 낮과 밤의 경계조차 모호했다. 꿈과 현실이 뒤섞인 공간에서 내가 지금 깨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꿈속으로 가라앉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내 이름만 기억났을 뿐, 나이와 주소는 안개 너머에 있었고, 내가 왜 그런 침대에 누워 있..

교통사고 이후 2026.0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