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삼척감자 2026. 9. 19. 22:06

오늘 새로 이사 온 이웃 남자와 통성명을 했다. 배가 몹시 나와 걷는 것조차 거북해 보이는 그가 “If you need anything, let me know.”(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라고 말하니  조금 우스웠다. 속으로 ‘누굴 돕기에 앞서 살부터 빼야겠어요, 아저씨’ 하고 혼잣말을 삼켰다.

 

미국에서 45년을 살며 여러 번 이사했고, 새로운 동네에서 낯선 이웃을 만나는 일도 여러 차례 겪었다. 그때마다 자주 듣는 말이 바로 “If you need anything, let me know”다. 오늘 만난 배불뚝이 프랭크도, 병색이 완연해 보이던 잭도, 휴대용 산소탱크를 끌며 걷던 조앤 할머니도 그랬다. 남을 돕기에는 신체적으로 한계가 있어 보이던 이들조차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렇게 말했다. 처음에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 의아했다. 정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도 된다는 뜻일까, 아니면 미국인들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 으레 건네는 형식적인 인사말일까.

 

미국에서는 이런 표현을 훨씬 가볍고 자연스럽게 주고받는다. 처음 만난 이웃에게도,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Let me know if you need anything”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미국인들이 모두 실제로 무엇이든 도와주겠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아닐 테다. 오히려 이 말은 상대방을 환영하며, 필요할 때 언제든 편하게 말을 걸어도 좋다는 제스쳐에 가깝다. ‘당신은 이제 우리 이웃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그런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이웃이라 해도 서로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침범하지 않는 것을 예의로 여긴다. 집 안에 무슨 일이 있는지, 가족관계는 어떠한지, 경제적 어려움은 없는지 함부로 묻지 않는다. 상대방이 먼저 이야기하지 않으면 굳이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미국인들의 이 거리감이 무관심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의 삶과 영역을 존중하기 위해 스스로 지켜주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누군가 나에게 “If you need anything, let me know”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이 진심인지 단순한 인사치레인지 굳이 가려내려 하지 않는다. 그 말 속에는 아마 이런 다짐이 담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생활에 함부로 끼어들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도움이 필요하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기꺼이 손을 내밀겠습니다.’ 한국의 정이 먼저 바짝 다가가 따뜻한 관계를 맺는 방식이라면, 미국의 친절은 상대방이 편안히 다가올 수 있도록 가만히 자리를 비워주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며 배워야 할 것은 다가갈 때와 조용히 물러서야 할 때를 아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먼저 찾아와 문을 두드려주는 이웃이 고마운 사람이 있고, 필요할 때만 찾아가도 반갑게 맞아주는 이웃이 고마운 사람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진다. 젊을 때는 폭넓고 가까운 관계를 많이 맺고 싶었지만, 이제는 서로의 삶을 존중하면서도 필요할 때 기꺼이 손을 내밀 수 있는 적당하고 담백한 관계가 한결 편안하게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도, 긴 말을 나누지 않아도 얼마든지 서로를 배려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제든지 말씀하세요”라는 그 짧은 한마디로도, 낯선 이웃을 향해 마음의 문을 가만히 열어줄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미국이라는 타향에서 오래 살아가며 조금씩 배워온, 또 하나의 이웃 사랑이다.

 

(2026년 9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