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81

밑바닥까지 떨어져 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행복

전에 살던 동네 체육관에 운동하러 가면 지주 보던 흑인 청년은 나를 보면 함박 웃음을 지으며 반가워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듬직한 체구의 백인 여자 간병인의 시중을 받으며 아주 기본적인 운동만 했다. 체육관에 처음 나올 때는 휠체어에 힘겹게 앉아있기만 했는데 1년 여가 지났어도 손을 흔드는 정도로 조금 호전되었을 뿐, 걷지 못하고 말을 못했다. 전동 휠체어에 달린 자판을 치면 컴퓨터에서 “How are you?” 정도의 간단한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나를 보고 반가워하는 건 일종의 동병상련일 것이다. 간병인을 통해 그와 통성명을 하고 몸이 불편한 정도를 서로 물어보았더니 약물 문제(마약인듯하다.)로 심장마비가 와서 그 후유증으로 전신마비가 되었다가 회복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몸이 부자유스러운데도 늘 얼..

교통사고 이후 2025.02.14

의족을 끼고 지내보니

내가 교통사고로 절단당한 왼쪽 다리에 의족을 끼고 두 개의 클러치를 짚고 지낸 지도 20년이 다 되어 간다. 가끔 절단 부위에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끼면 의족 안에 끼는 라이너를 빼어 바람을 쐬어 주고 위치도 바로잡아 주어야 한다. 운동 중이거나 미사 중일 때를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의 시선도 가리지 않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럴 때마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하다.그런 내 모습에 익숙한 성당 교우들은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지만, 의족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어색해하거나 지나친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은 대개 약간의 공포심을 드러내며 내 의족에서 쉽사리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준다.   체육관에서 만난 어떤 이는 힘들었겠다고 위로하며 “당신 참 대..

교통사고 이후 2025.02.07

그게 예지몽이었던가?

거의 20년 전에 교통사고로 입원 중 두 달 가까이 혼수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넓은 건물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 실내가 무척 어둡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여기가 어딜까?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내가 다니는 성당은 아니고, 두 딸이 다니던 대학교 예배당인가? 거기도 아니었다. 수많은 긴 의자가 줄 이어 설치되었고, 내부 장식을 보니 성당이 맞기는 한데, 낯익은 곳은 아니었다.긴 의자 몇 개에는 서류 더미가 잔뜩 쌓여 있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좀 떨어진 곳에서 가까이 지내는 M 형제가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아마 그와 나, 둘이서 성당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던 듯 싶다.밖에 눈이 무척 많이 내려서 일 끝내고 집에 갈 일이 걱정이라고 그가 말했..

교통사고 이후 2025.01.30

살아보니 살아지더라

얼마 전에 몇 년 전까지 다니던 성당의 어느 젊은이가 여러 해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고생을 했지만, 이제는 일어나 부자연스럽게나마 걷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비슷한 고통을 겪은 나는 오랫동안 그 젊은이와 가족이 겪은 어려움과 고통을 떠올리며 마음 깊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삶을 살아가며 만들어내는 모든 작은 기적은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기쁨의 순간은 가끔 있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순간들, 환자가 작은 진전을 이룰 때마다 느끼는 기쁨, 그리고 함께 나누는 사랑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도 그 젊은이의 가족이 이런 기쁨을 자주 느끼길 기원한다.내가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은 지도 내년 6월이면 20년이 된다. 주님을 원망하다가, 주님이..

교통사고 이후 2024.12.05

이 좋은 아침에

아내가 15일간의 일정으로 독일 여행을 떠났다. 늘 옆에 있던 사람이 떠나니 낮에는 할 일이 없고, 밤에는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그렇게 해서 시간이 넘쳐나니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일을 마무리 짓기로 했다.2005년의 교통사고 이후에 쓴 글들 중 사고와 관련된 글을 모아서“이 좋은 아침에” 라는 제목으로 책을 묶고,한국어 독해력이 떨어지는 우리 딸네 가족과 독일에 사는 외 조카딸 가족에 읽히기 위해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영문으로 번역한 글을 모아서“Good Morning”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묶었다.그동안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그리고 신문에 같은 내용이 게재되었기에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지도 않았고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읽은 것이므로이 두 권의 책은 오직 우리 가족들에게만 배부될 것이지만,아내의 부재 중에 이..

교통사고 이후 2024.10.17

한밤에 찾아온 손님

밤늦게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한밤중인 한시 조금 지나 찾아와서 해가 뜨고도 한참 지날 때까지 떠나지 않아 밤새도록 한숨도 자질 못 했다. 그 손님이란 60년 가까이 나와 한 몸을 이루어 지내다가 사고로 떠나 보낸 내 왼쪽 다리다. 병원에서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손님이 처음 찾아왔을 때는 놀랍기도 했고 반갑기도 해서 찾아오면 “너 어디 있었니?”라며 반가워하며 그가 갖고 온 ‘아픔’이라는 선물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왼쪽 다리의 남은 부분을 들어 올리면 다시 찾아온 손님의 묵직한 무게도 느낄 수 있고, 통증이라는 신호로 몸 전체에 존재감을 표하는 게 신기했다. 그 신호란 게 환상통이다. 그렇게 환상통을 벗하며 지낸 게 10년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자주 찾아오더니 시간이 ..

교통사고 이후 2024.10.03

큰일을 해냈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가 절단되고 다른 하나는 망가진 나는 의족을 끼지 않으면 설 수가 없고, 쌍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서 있을 때는 언제나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하므로 일상적인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진공청소기를 끌고 청소하는 건 꿈도 못 꾸지만, 다행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문제가 없어서 마늘 까기, 파 썰기, 양파 갈기, 감자 껍질 벗기기 같은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내를 돕는다.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서둘러 성당에 가면 부엌 싱크대에 기대서 설거지도 하고, 가끔은 아내가 멀리하지만, 나는 즐기는 국수를 끓이거나 간단한 요리를 직접 하기도 한다. 물론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뜨거운 기름이나 물이 튀어서 얼결에 넘어지지..

교통사고 이후 2024.10.03

잃으면 돌이킬 수 없는 것

비비안 톰슨이라는 여자는 여섯 살에 소아 당뇨 진단을 받고 순환기 장애로 고생하다가 40대 초반에 오른쪽 다리의 무릎 아랫부분을 절단한 이후로 의족을 착용하고 지내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심경을 적은 글 일부를 번역하여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의족을 착용하니 새장 밖으로 나온 새가 된 듯했다. 두 다리로 서서 걷는다는 건 정말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지내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겠지만 말이다.   의족을 끼고 걷기를 배웠지만, 모든 걸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전처럼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도 없었고, 이전처럼 손과 무릎을 사용해서 정원 가꾸기를 할 수 없었고, 약간 비탈진 뜰을 마음대로 거닐 수도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의족부터 끼어야 했고, 하루..

교통사고 이후 2024.10.03

에릭 가족의 고난

구약성경 욥기를 보면 하느님과의 내기에 따라 사탄은 도둑들이 욥의 재산을 약탈하게 하거나 불태우게 하고, 하인들을 빼앗거나 죽이게 하였고 또 천재지변으로 아들 일곱, 딸 셋인 그의 자식을 모두 잃게 한다. 그럴 때마다 심부름꾼이 그에게 달려와 “저 혼자만 살아남아 이렇게 소식을 전해 드립니다.”라며 흉보를 전한다. 그렇게 네 번에 걸쳐서 욥은 가진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게 바로 하늘이 무너지는 게 아니고 뭘까?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내 가족도 하늘이 무너지는 체험을 한 번 했다. 못난 가장이 날벼락 같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의식을 잃고 병상에 누워 있을 때가 그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진 때였을 거다. 여러 차례에 걸친 수술 ..

교통사고 이후 2024.10.03

안락사에 대하여

영화 Me Before You를 보고   ‘그대 앞의 나(Me Before You)’라는 영화는 흔한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이지만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년간 일해온 카페가 문을 닫으며 하루아침에 실직한 루이자 클라크(26세),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전신 마비 장애인을 간병하는 일에 지원하게 된다. 그녀가 돌봐야 하는 윌 트레이너(31세)는 부유한 상류층 출신에 인물까지 잘생겼고 만능 스포츠맨에 유능한 사업가였는데,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된 후 까칠한 성격으로 변한 인물이었다.  7년 동안 사귀며 결혼을 약속했던 매력적인 애인이 사고가 난 후에 떠나고, 유능하고 활동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윌은 앞으로도 평생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

교통사고 이후 2024.1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