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12

환상통아 물러가라

몇 년 만에 아주 센 놈이 찾아왔다.환상통이라는 놈 말이다.어쩌다 찾아오는 그놈은 꼭 내가 잠자리에 들 무렵부터 아는 체하기 시작해서밤새도록 들볶는다. 수시로 바늘로 다리 절단 부위를 집중적으로찔러대는 것 같으니 잠을 잘 수도 없다. 가끔 견딜 수 없어서 신음을 내기도 한다.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별의별 진통제를 먹어 봐도 효과가 없다.통증 전문의, 내과의사의 처방전도 소용이 없다.그래도 물러갈 때를 알아서 소리 없이 사라지니 고맙다.찾아올 때마다 반갑지는 않지만, 덕분에 밀린 독서도 하고모아둔 영화도 골라 보기도 하니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이제 날도 밝았으니 그만 물러가고 제발 이제는 그만 찾아오너라.

교통사고 이후 2024.08.21

아~ 아~ 잊으랴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리 하나를 잃은 날이 바로 19년 전 오늘이었다.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잊을 수 없는 날이기에 해마다 오늘이 되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서 고마운 날”을 기념한다. 거국적인 기념일이 아니니 애국가 봉창이라던가  그런 거창한 건 생략하고 많은 고마운 분에게 마음속으로 두루두루 감사드리고 저녁에 간단히 술 한잔하며 기념일을 보낸다. 오늘은 마침 점심을 함께하기로 한 분들이 있으니, 그분들을 은인들 대표로 삼아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오랜 세월, 망가졌지만, 열심히 버텨 준 내 몸에게도 감사해야 하겠다. 그리고 다리 절단 이후 가끔 찾아와서 편히 잠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언제 만나도 반갑지 않은 환상통에게는 “이제 제발 그만 찾아오너라.”라며 작별을 고해야 하겠다. 지난 열아홉 해,..

교통사고 이후 2024.06.27

희망고문

2005년 말 교통사고로 6개월간 입원했던 병원에서 퇴원하기 며칠 전 신경외과 의사가 절단되지는 않았지만, 망가져 신경이 온통 손상되어 발을 올릴 수도 없는 오른쪽 다리를 꼼꼼히 검사하고 나서 말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은, 손상된 신경이 많이 손상되어 거의 평생 브레이스(발받침기)를 착용해야 합니다. 좋은 소식은 손상된 신경이 천천히 자라고 있습니다. 정상으로 회복되는 데는 30년 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내 나이가 57세였다. 아흔이 다 되어 신경이 복구된들 그 나이에 운전을 할 건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리고 19년이 흘렀지만, 회복될 거라는 신경은 감감무소식이다. 여전히 오른쪽 다리는 감각이 없고, 브레이스를 착용하지 않으면 걷기도 힘든다. 운전은 언감생심이..

교통사고 이후 2024.05.14

쓸 수 없는 선물

아는 분이 내게 남성용 서류가방을 선물로 줬다. 납작하고 길쭉한 모양인데 그리 작은 편은 아니었다. 가죽 냄새가 풀풀 나는 게 새것 같았지만, 안타깝게도 바로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늘 크러치 두 개를 짚고 다니니 손으로 물건을 들 수도 없고, 나같이 나이 든 사람이 서류를 들고 다닐 일도, 그걸 담을 가방도 필요가 없는데... 거절하는 나도 민망스럽고, 선물을 준비해온 사람도 서운하겠지만, 쓸 일도 없는 물건을 받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싸구려 와인 한 병이었더라면 기쁜 마음으로 받았을 텐데. 외손녀 외손자들에게 선물할 때마다 딸들에게 미리 물어 보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통사고 이후 2024.04.08

Life is good

늦잠에서 깨어나 전화기에 뜬 날짜를 보니 오늘이 6월 27일이다. 오늘이 무슨 날이더라? 생각해 보니 바로 18년 전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한 날이다. 사고 두 달 후에 의식을 되찾고 매일 아침을 맞을 때마다 하루만이라도 더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루하루가 쌓여서 18년이나 더 살았으니 참 오래 산 셈이다. 먼저 이 나이 되도록 먹고 살게 해 주시고, 건강 주신 하느님과 긴 세월 고통을 함께 한 가족과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신 은인들께 감사드린다. 돌이켜 보니 산다는 게 참 지겨울 때도 있었지만, 살아보니 산다는 건 좋은 거다. “Life is good. Do you know what I mean?”

교통사고 이후 2023.07.01

드디어 좌골신경통이 찾아왔다.

드디어 좌골신경통이 찾아왔다. 엉덩이와 종아리가 아프기 시작하자, 늘 클러치 두 개를 짚고 구부정하게 걷는 내게 허리 통증이 언젠가는 찾아올 거라는 반갑지 않은 예언을 한 한의사 얼굴이 떠올랐다. 늘 자세에 신경을 썼건만, 통증이 찾아왔으니 이게 나이 탓인가, 보행 자세 탓인가? 불편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라서 그냥 두면 낫겠지 하며 2, 3일 미적대다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어저께부터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치료받으러 가는 게 귀찮아서 진통제를 먹으면 괜찮고, 걸을 때만 좀 신경 쓰이지만, 이런 치료까지 받아야 하냐고 투덜댔더니, 아내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Let’s go to the therapists!”를 외쳤다. 이런 환자를 많이 다뤄보았는지 물리치료사는 내 시원찮은 설명을 듣고 단..

교통사고 이후 2023.04.19

해 뜨고, 해 지네

어쩌다 뉴저지 남단의 바닷가 마을에서 며칠 머물다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해 뜨는 시간에 맞추어 새벽에 일어나 해 뜨는 걸 보고, 저녁에는 해 지는 걸 보며 사진을 찍는다. 오래전에 거기서 찍은 사진을 보니 사진이 거의 같아 보여서 어떤 게 해돋이이고 어떤 게 해넘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해가 진 다음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또는 밤이 아침으로 바뀌기 전의 어둑어둑한 상태를 어스름(영어로는 Twilight)이라고 한다. 천문학에서는 해가 뜨기 조금 전인 상태를 새벽(Dawn)이라고 하며, 그걸 다시 3등분하여 수평선에서 떨어진 각도에 따라 6도씩 구분하여 각각 달리 부른다. 마찬가지로 해가 지고 조금 후의 상태를 황혼(Dusk)이라고 하며, 그걸 다시 3등분하여 수평선에서 ..

교통사고 이후 2023.04.13

심폐소생술을 지켜보고

내가 이용하는 헬스클럽은 큰 종합 병원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인데 며칠 전에 거기서 우연히 심폐소생술을 시행하는 걸 보게 되었다. 심폐소생술이란 심장의 기능이 정지하거나 호흡이 멈추었을 때 시행하는 응급조치이다. 심장마비의 경우 신속히 조치하지 않으면 사망하거나 심각한 뇌 손상을 입을 수 있으므로 환자를 발견한 목격자가 신속히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운동이 끝나고 혈압이나 측정해 보려고 의자에 앉아서 혈압계의 커프를 팔에 끼우려고 하는데 몇 걸음 떨어진 운동기구에 앉아 있던 사람의 몸이 옆으로 쓰러지는 게 보였다. 그 부근에 있던 키가 무척 큰 여자 트레이너가 얼른 다가가서 “Are you OK?”라고´물어보았지만, 대답이 없었고, 이내 “응급상황 발생”이라는 구내방송이 흘러나왔다. ..

교통사고 이후 2022.09.05

새벽의 여신 에오스를 맞으며

그리스 신화에서 광명의 신 히페리온과 창공의 여신 테이아의 사이에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으니 태양신 헬리오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 그리고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그들이다. 헬리오스는 네 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새벽녘에 동쪽에서 솟아오르고 저녁에는 서쪽으로 가라앉아 다시 동쪽으로 가는 여행을 반복한다. 셀레네는 검은 말들이 이끄는 은빛 마차를 몰면서 밤의 장막을 치는 일을 한다. 에오스는 두 마리의 날개 달린 말들이 모는 황금 마차를 몰며, 셀레네가 쳐놓은 밤의 장막을 매일 아침 손가락으로 걷어내는 일을 한다. 에오스가 하는 일이 비중이 작아 보이지만, 밤을 아침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중요한 일을 하는 셈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병원에 반년 동안 입원했었는데, 그동안 내내 잠을 제대로 잘 수 ..

교통사고 이후 2022.09.04

사지 마비 장애인들 영화

사지 마비 또는 하반신마비 상태가 된 인물들의 삶을 다룬 영화 세 편을 보았다. 세 영화의 주인공들 모두 사고로 심한 장애를 입게 되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 두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의 도움으로 삶의 의욕을 되찾았으나, 한 사람은 사랑하는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조력(助力)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삶을 포기한다. 각자 느끼는 고통의 크기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니 선택도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선택을 존중하고 싶지는 않다. 이들 영화의 줄거리를 아래와 같아 소개한다. Intouchables: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프랑스 영화 파리의 빈민가에 사는 세네갈 출신의 전과자 드리스는 엄청난 부자인 사지(四肢) 마비 환자가 입주 간병인을 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자리에 지원하지만, 사실은 일하..

교통사고 이후 2022.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