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해 뜨고, 해 지네

삼척감자 2023. 4. 13. 03:22

 

어쩌다 뉴저지 남단의 바닷가 마을에서 며칠 머물다 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해 뜨는 시간에 맞추어 새벽에 일어나 해 뜨는 걸 보고, 저녁에는 해 지는 걸 보며 사진을 찍는다. 오래전에 거기서 찍은 사진을 보니 사진이 거의 같아 보여서 어떤 게 해돋이이고 어떤 게 해넘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해가 진 다음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또는 밤이 아침으로 바뀌기 전의 어둑어둑한 상태를 어스름(영어로는 Twilight)이라고 한다. 천문학에서는 해가 뜨기 조금 전인 상태를 새벽(Dawn)이라고 하며, 그걸 다시 3등분하여 수평선에서 떨어진 각도에 따라 6도씩 구분하여 각각 달리 부른다. 마찬가지로 해가 지고 조금 후의 상태를 황혼(Dusk)이라고 하며, 그걸 다시 3등분하여 수평선에서 떨어진 각도에 따라 6도씩 구분하여 각각 달리 부른다. 새벽이든 황혼이든 수평선에서 떨어진 같은 각도에 해가 위치하면 비치는 햇빛의 밝기는 같다. 그러니 해 뜨는 사진이나 해 지는 사진이나 거의 같을 수밖에 없다.  

 

일출(Sunrise)은 아침에 태양의 테두리 가장 윗부분이 수평선에 닿는 순간이며, 일몰(Sunset)은 저녁에 태양의 테두리 가장 윗부분이 수평선에 닿는 순간이라고 정의된다고 한다. 요컨대 일몰—(셋으로 구분된) 황혼—(셋으로 구분된) 새벽일출이런 순서대로 빛과 어두움이 반복되며 시간이 흐른다. 하루를 이렇게 열 가지로 구분하되 해가 진 직후와 해뜨기 직전을 세분한 까닭은 낮과 밤은 명암에 변화가 별로 없지만, 일몰 직후와 일출 직전에 명암의 변화가 심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창세 1, 5)는 정도로 무심히 하루를 지낼 뿐, 일상에서 이런 변화를 민감하게 느끼며 지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오래 전에 병원에서, 그것도 중환자실에서 사투를 벌이는 환자가 되어 창가에 있는 병상에서 보았더니, 해가 져서 점점 어두워지더니 밤이 되고, 해가 뜨고 점점 밝아지더니 낮이 되는 과정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 다리 한 개를 절단하고 겪는 극심한 통증을 완화하려고 투여된 (아마도 마약 성분인) 강력한 진통제 때문인지 밤이나 낮이나 몽롱한 상태로 지낼 때였다. 한밤중에도 수시로 의료진이 들락거리며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매일 자정이 훨씬 지나서 몸을 닦아주고, 청소한다고 쿵쾅거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밤중에 몇 번씩이나 끓는 가래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서 호출 벨을 수없이 눌러도 간호사는 거의 언제나 못 들은 체했다. 어쩌다가 와도, 헐떡거리는 환자를 들여다보고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환자를 조롱하곤 했다. 자신들이 할 일이 있을 때는 수시로 환자를 깨우며 잠도 못 자게 하더니 정작 환자가 그들을 필요로 할 때는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매일 밤새 혼자서 거의 뜬눈으로 새우다시피 하며 아침이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그때 내가 아침을 기다리던 심정은 파수꾼들이 아침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시편 130, 6)라는 성경 구절의 간절한 마음보다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밉살스러운 간호보조원이 친절한 정식 간호사와 임무 교대를 하고, 아내가 오고, 낮에는 문병객들도 계속 찾아주니 중환자 노릇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그러다가 해 질 무렵이 되고 길고도 긴 밤이 다가온다고 느끼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새벽이 오면 밤새 살아남아서 오늘 하루를 더 살 수 있겠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저녁 어스름이 다가오는 걸 느끼면 밤새 고통스러워하며 죽음의 공포에 시달릴 밤이 오는 게 그렇게 무서울 수 없었다.

 

그렇게 병실에서 7개월을 지내 보고 나서 아무리 길고 지독히 어두운 밤이라도 끝나고 태양은 반드시 뜨며,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자신을 드러낼 시간을 기다린다는 걸 알았다. 그러기에 칠흙같이 어두운 밤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들을 볼 수 있듯이 끔찍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희망이라는 걸 잃지 않을 수 있나보다.

 

일반적으로 빛은 긍정적인 것으로 어둠은 부정적인 것으로 인식된다. 성경을 보면 빛과 어둠은 낮과 밤, 행복과 불행, 지혜와 우매함, 좋은 것과 나쁜 것, 단 것과 쓴 것, 의로움과 불법 등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생에는 햇빛만 비치는 것도 아니고, 어두운 밤만 계속되는 것도 아니다. 빛과 어두움이 교대로 오고, 때로는 이 두 가지가 겹치기도 하지만, 인생이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가는 일이 반복되는 여정일 것이다.

 

‘Fiddler on the Roof’의 주제곡 ‘Sunrise, Sunset’의 가사처럼 밤과 낮이 반복되는 우리 인생도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빠르게 흘러간다. 우리 외손자들과 외손녀들이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길게만 느껴졌던 어두운 밤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하고 싶다.

 

이 소녀가 내가 봐주던 그 아이인가? / 이 소년이 내가 놀아주던 그 꼬마인가? /

얘네들이 언제 이렇게 자랐지? / 어느새 이렇게 아름다워졌지! / 키가 훌쩍 컸네! /

어제만 해도 어린애들이었는데

 

해 뜨고, 해 지네 / 해 뜨고, 해 지네 / 시간은 빨리도 흘러 /

씨뿌리니 밤새 자라서 / 우리가 보는 사이에 꽃을 피우네.

 

(2023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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