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에서 광명의 신 히페리온과 창공의 여신 테이아의 사이에는 아들 하나와 딸 둘이 있으니 태양신 헬리오스와 달의 여신 셀레네 그리고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그들이다.
헬리오스는 네 마리의 말이 모는 마차를 타고 새벽녘에 동쪽에서 솟아오르고 저녁에는 서쪽으로 가라앉아 다시 동쪽으로 가는 여행을 반복한다. 셀레네는 검은 말들이 이끄는 은빛 마차를 몰면서 밤의 장막을 치는 일을 한다. 에오스는 두 마리의 날개 달린 말들이 모는 황금 마차를 몰며, 셀레네가 쳐놓은 밤의 장막을 매일 아침 손가락으로 걷어내는 일을 한다. 에오스가 하는 일이 비중이 작아 보이지만, 밤을 아침으로, 어둠을 빛으로 바꾸는 중요한 일을 하는 셈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병원에 반년 동안 입원했었는데, 그동안 내내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지 환자를 편히 쉬게 하는 곳이 아니라는 원칙에 충실해서였는지 병원에서는 밤에도 환자를 들볶아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수시로 갖가지 검사를 하고, 때로는 병상에서 엑스선 촬영까지 하고, 몸도 밤에 씻겨 주고, 청소도 대개 한밤중에 했다. 환자 몸에 연결된 계측기에서 이상을 알리는 경고음도 수시로 울리고, 그때마다 부산스럽게 오가는 간호사의 발걸음 소리도 숙면을 방해했다. 그렇게 환자 취급을 제대로 받다 보면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기 힘들었다.
게다가 나의 몸 상태도 잠자기는 어려운 형편이었다. 진통제 없이 견딜 수 없는 통증과 끊임없이 터지는 기침도 문제였지만, 망가진 허파에서는 왜 그리도 가래가 자주 올라왔는지. 그 때문에 질식하지 않으려면 수시로 간호사의 도움을 받아 그걸 뽑아내야 했다. 음식을 삼키지 못해서 위장에 연결된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공급받았는데 조그만 통에 든 음식을 소형 펌프로 위장에 넣어 주려면 자그마치 열 몇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 밤새 돌아가는 모터의 소음이 거슬렸고, 유동식이 죽지 않을 만큼만 공급되어서 늘 배가 고팠다.
그래서 잠깐씩 도막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니 밤마다 괴롭기 그지없었다. 때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꼬박 밤을 새우기도 했다. 간호사들은 잠을 못 자게 해 놓고는 자지 않는다고 구박하기도 했고, 의사에게 얘기해서 수면제를 먹이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기였다. 그러다가 새벽의 여신 에오스가 장미빛 손가락으로 밤의 장막을 걷어내어 동이 트는 걸 느끼면 간호사에게 눈짓으로 창의 블라인드를 활짝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해가 서서히 떠올라 세상이 환해지는 걸 느끼면 이렇게 하루를 더 살 수 있겠거니 느끼며 큰 기쁨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페르 귄트에 나오는 제1조곡 ‘Morning Mood’가 듣고 싶어졌다. 솔베이지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지만,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녀를 버려둔 채 배를 타고 장사를 다니던 중 모로코에서 맞은 아침 일출을 보고 느낀 기분을 묘사한 그 음악 말이다. 바닷가에서 맞이하는 아침 새벽빛이 수평선을 따라 부드럽게 번져나가는 모로코 해안의 풍경이 상쾌하게 묘사된 그 음악을 들으면 다시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샘솟을 것 같았다.
그때 두 가지를 결심했다. 하나는, ‘퇴원하면 아침마다 ’Morning Mood’를 들으며 장엄한 하루를 맞이하겠다.’였고, 또 하나는, ‘죽지 않고 살아나면 바로 바닷가로 가서 해 뜨는 걸 지켜보겠다.’였다. 하지만 퇴원하고 그 음악을 두어 번 듣고는 그 다짐마저 잊고 살았다. 그리고 퇴원하고 몸을 추수린 다음 바로 바닷가에서 며칠 묵으며 아침해가 뜨는 걸 보고 벅찬 감동을 느꼈다. 며칠 전에 함께 성당에 다니는 시몬 형님이 보내준 뉴저지 바닷가의 일출 사진을 보니 퇴원 후 처음 일출을 보고 느꼈던 벅찬 감동이 되살아 나는 것 같았다.
나이 들어가며 요즈음은 밤잠을 깊이 못 이루고 꼭두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잦다. 내일 새벽에 잠이 깨면 에오스 여신을 맞으며 오랜만에 ’Morning Mood’를 들어야 하겠다.
(2020년 7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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