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드니 잠이 준다. 밤새 깊은 잠에 빠지기 어렵고, 일찍 깬다. 자는 동안에도 자주 뒤척이게 돼 아침에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지 않다. 잠이 부족하니 낮에 의자에 앉은 채 시도 때도 없이 존다. 일찍 깨어도 다시 잠들 수 없어서 꼭두새벽에 잠이 깨면 다시 자는 걸 포기하고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 게 버릇이 되었다. 다들 잠든 시간에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놓고 신문을 보거나 유튜브를 보고, 때로는 책을 읽기도 하고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나 혼자만의 새벽 시간이 마냥 고요하고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 나이 되도록 제대로 이룬 것이 없다는 자책감, 가보지 못 한 길에 대한 아쉬움, 잘못한 일에 대한 자괴감, 최선을 다하지 못 한 일에 대한 회한, 남에게 마음의 상처를 준 일에 대한 후회. 내 잘못도 아닌데 교통사고를 당한 억울함, 이런 생각이 불쑥 떠오르곤 해서 마음의 평화를 자주 잃는다.
은퇴자의 일상은 단조롭다. 하루하루가 늘 비슷하게 흘러간다.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책상 앞에 앉아 이것저것 해보지만, 그런 게 돈 되는 일도 아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거지만, 그렇게 자신을 들볶고 몰아붙이고 못살게 굴며 열심히 산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자신을 그냥 쉬게 두어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가하면 괜히 불안하다.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자책하거나 자신을 들볶는 건 자존감이 낮아서 그럴 수 있다고 하며 이렇게 설명한다. “자존감의 정도는 우리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자존감이란 단어의 정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주관적인 느낌이다. 재산, 외모, 체력, 직업, 인기, 저명도 그리고 인간관계 등의 항목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을 주관적으로 평가하며 자존감이 올라가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한다.”
성경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창세 1, 26), “제가 오묘하게 지어졌으니 당신을 찬송합니다.” (시편 139, 14)”라고 말하고 있으나 세상에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하고 오묘하게 지어진 사람은 극소수로 보이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이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존감을 높이기란 어렵다.
잔소리하기 좋아하는 잘난 사람들은 대개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일이 잘되게 하려면 진실로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자신을 들볶지 말고 가만 놔둬라.” “자기반성은 적당해야 오래 산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누구는 그런 말을 할 줄 몰라서 안 하나? 잘난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니 받아들이기도 쉽지 않다. 마치 돈 많은 사람이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더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서 듣기 거북하다.
얼마 전 신문에서 “나는 고통의 흔적을 지우는 유령 청소부입니다”로 시작되는 김완 하드웍스 대표와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특수 청소부인 그는 경찰과 유족, 건물주의 의뢰로 범죄와 고독사 현장, 쓰레기 집을 청소한다. 자신을 몰래 집에 들어가 ‘고통의 흔적을 지우는’ 유령 청소부라고 했다. 피를 닦고 구더기를 치운다는 그의 얘기가 흥미로웠는데 인터뷰 기사 중에서 “죽음의 현장에서 제가 봤던 건 엄청난 고통의 흔적이었어요. 자기 자신에게 가혹하지 말았으면 해요. 돈이 없어도 꿈을 못 이뤘어도, 자기를 좀 더 용서하고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열심히 살고 있었나?' 자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잘살고 있어요. 부디 자기 자신과 잘 지내세요.”라는 그의 말이 마음에 강렬하게 와닿았다. 남들이 꺼리는 직업에 종사하는 그의 말이라서 유명한 사람들의 말보다 더 울림이 컸다.
오늘이 내가 16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리 하나를 잃은 날이다. 다시 살아나 두 번째 인생을 살며, 살아 있다는 사실에 벅찬 기쁨을 느낀 적도 있었고, 장애가 된 몸이라서 포기해야 할 것이 많아서 좌절한 적도 많았지만, 이제부터 이 세상 떠나는 날까지는 우선 자책하지 말고 나 자신과 잘 지내야 하겠다. 그게 그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움을 주신 은인들에게 잘 살고 있다고 보여 드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2021년 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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