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68

추 메이 할머니

‘추 메이’이웃에 사는 대만 출신 85세 할머니의 이름을 처음 듣고는 한국 여성 정치인의 이름과 거의 같아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두루뭉술한 체격에 건들건들 걷는 모습, 그리고 아무렇게나 걸친 옷차림이 우리가 어려서 고국에서 대하던 중국 여성과 비슷해서 멀리서 보아도 영락없는 중국인으로 보였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간에 가끔 얘기를 나눠보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았다.엊그제 산책길에 만난 아내에게 직접 짠 모자 두 개가를 주더란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아내 것. 써 보니 내 머리에 딱 맞았다. 사실 내 거는 두 개를 짜 두었는데, 그 전날 산책길에서 나를 만나 내 머리통을 유심히 보았더니 생각보다 커 보여서 그중 큰 걸로 주는 거라고 했다.이름이 누구랑 비슷하면 어떤가? 건들건들 걸..

미국 생활 2024.09.06

비밀이 없는 세상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는 체육관에 갈 때마다 만나게 되는 한국인이 여러 사람 있다. 대부분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분들이라 볼 때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 중에서도 M씨는 매일 빠짐 없이 출근해서 열심히 운동하는 모범생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보이지 않더니 석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한국인들끼리 만날 때마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아픈가?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체육관에 나오면 늘 만날 수 있던 사람이라 그의 연락처를 받아 둔 사람이 없었다. 관리 사무실에 물어 보았지만 사생활에 관한 거라 연락처를 알려 줄 수 없다고 한다. 답답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구글에 그이 이름과 사는 동네 ..

미국 생활 2024.08.31

조셉이 세상을 떠났다

외출에서 돌아 오다가 이웃 할머니 조앤의 큰아들 지미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우리 부부를 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저께 동생 조셉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이럴 때 쓰는 인사말 “I am sorry to hear about your loss.”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머뭇거리는데,엄마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다.몇 년 동안 암으로 고생했기에 어쩌면 죽음이 그의 고통을 덜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4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조셉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두어 달 전에 만났을 때 조만간 키포트 바닷가 낚시터에서 보자고 했지만, 오랜 투병으로 병색이 짙은 그를 보며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어려울 거로 생각하기는 했으니 막상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

미국 생활 2024.08.17

조앤 할머니

체육관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가 조앤 할머니를 만났더니 손짓하며 할 말이 있으며 기다려 달라고 한다.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낀 채 며느리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 마치 바싹 마른 가랑잎 같았다. 늘 쾌활한 큰아들 지미의 얼굴은 침통해 보였다. 얼마 전에 들은 말이 있기에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스티브, 조셉(작은아들)이 입원했어. 이번이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아.”매사추세츠주에 사는 딸 내외도 얼마 전에 다녀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큰아들 내외도 방문할 때마다 조셉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아흔 가까이 된 할머니는 늘 산소호흡기를 끼고 지내지만, 건강은 그만그만한 것 같았다.조셉은 몇 년 전부터 암으로 투병 중이지만, 가끔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지낸다고 했다.부모 ..

미국 생활 2024.08.14

적산전력계 검침 문제

며칠 전 이메일로 온 7월분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달 치 전기 요금이 대개 $30~50였는데, 갑자기 $362로 치솟을 까닭이 없다. 대학교 때 전공과목 중 하나인 ‘전기계측’ 시간에 공부한 전력 사용량 측정기인 적산 전력계의 구조도 단순하여 고장이 날 일이 없다. 더구나 두 달 전에 아날로그식을 디지털식으로 바꾼 최신형인데 그 사이에 고장날 까닭이 없다. 분명히 검침원이 실수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1년간의 매달 전기 요금과 사용량 기록을 모았더니 그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전기 요금을 그대로 내고 그냥 두어도 잘못 부과된 요금은 앞으로의 검침을 통해 자동 정산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는 싫었다. 설사 앞으로 몇 달 동안 요금을 내지 않고 넘어가더라도 $50..

미국 생활 2024.08.13

Garden State

뉴저지의 별명인 "Garden State"는 이 주가 오랫동안 과일과 채소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여전히 블루베리, 크랜베리, 토마토의 미국 내 제일가는 재배지 중 하나라는 데서 유래한다. 뉴저지의 토양과 기후는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여 정원사와 농부 모두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이 별명은 1954년 뉴저지주 자동차 번호판에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뉴저지의 면적은 남한의 22.5%, 인구는 930만 명으로서 인구밀도는 남한과 거의 같다. 그래도 산이 별로 없고 가용 면적이 넓어서인지 한국처럼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한국과 기후가 비슷하지만, 장마철이 없고, 겨울에 눈이 마음먹고 내리면 무섭게 내린다. 봄과 가을이 한국보다는 짧다. 녹지대가 많고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맞닿은해변이 이어..

미국 생활 2024.07.28

배불뚝이 이웃 영감

우리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배불뚝이 영감은 아침마다 늙은 개와 함께 산책한다. 그의 아내가 가끔 터키를 방문했다고 말하더라니 거기 출신인가 보다. 그의 외동딸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맡기러 가끔 오곤하는데 우리 딸들보다 어려 보이는 걸로 보아 그 영감도 나보다 나이가 적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 영감과 나는 둘 다 무뚝뚝한 편이라 산책길에서 지나쳐도 마지 못해 ‘Good Morning!”이라는 인사를 주고받기는 해도 대개는 못 본 체한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고, 성도 당연히 모르고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른다.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그 영감이 느닷없이 “Good Morning, YOUNG MAN!”이라고 인사했다. Young Man이라? 그 영감이 나를 어리게 본다는 얘기렸다. 나이 차이를 그리 문..

미국 생활 2024.07.22

엔지 할머니

에어컨 덕분에 시원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대로 동네 한 바퀴를 걷기 시작했는데 좀 더웠다. 덥다 못해 피부에 와닿는 햇살이 따가웠다.머리에 쓴 모자만 믿고 조금 걷다 보니 너무 더워서 포기할까, 말까 하고 갈등을 느끼는데, 마침 담배 피우러 집밖에 나와 있던 엔지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대강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스티브, 이 미친놈아.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당장 걷는 거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 당장.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구시렁구시렁……”계속 걷기에는 더위보다는 할머니 욕설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뒤로 전진해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야, 이거 받아!”라는 고함이 들려서 돌아보니 바로 엔지 ..

미국 생활 2024.06.22

메리라는 여자

얼마 전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이웃 영감이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당신 메리라는 여자 알지?”“알다마다요. 패션모델 출신이었다는 여자 말이지요?”노인들이 사는 콘도 단지에서 60대 초반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아직도 뒤태에 눈길이 끌리게 하는 패션모델 출신 독신 여성은 동네 영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그 여자, 좀 이상한 여자야. 말 섞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몇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길을 휙 지나가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을 만나도 거의 아는 체하지 않고 언제나 밀짚모자 같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집 앞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을 때 말고는 오래된 현대 엘란트라와 시간을 보낸다.차에 덮개를 씌우..

미국 생활 2024.06.19

바람피운 남편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되어서

아침 산책길에 85세인 중국 태생 할머니 헬렌을 만났다. 외출복을 입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어쩐지 쑥스러워하더니 외출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오늘이 딸들 아버지 49재 날이라서 무덤에 가려고 하던 참이야. 당신, 49재가 뭔지 알지?”“알다마다요. 전 남편이 오늘까지는 지상에 머무르다가 내일이면 천국으로 떠나겠네요?”“전 남편이라기보다는 애들 아빠지. 밤새 무덤에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 한숨도 못 잤어. 그런데 떨어져 사는 딸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무덤에 꽃이라도 두고 오려고 해.”그녀는 기독교 신자라서 49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지만, 20여 년 전에 바람피우다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그 여자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

미국 생활 202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