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72

배불뚝이 이웃 영감

우리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배불뚝이 영감은 아침마다 늙은 개와 함께 산책한다. 그의 아내가 가끔 터키를 방문했다고 말하더라니 거기 출신인가 보다. 그의 외동딸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맡기러 가끔 오곤하는데 우리 딸들보다 어려 보이는 걸로 보아 그 영감도 나보다 나이가 적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 영감과 나는 둘 다 무뚝뚝한 편이라 산책길에서 지나쳐도 마지 못해 ‘Good Morning!”이라는 인사를 주고받기는 해도 대개는 못 본 체한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고, 성도 당연히 모르고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른다.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그 영감이 느닷없이 “Good Morning, YOUNG MAN!”이라고 인사했다. Young Man이라? 그 영감이 나를 어리게 본다는 얘기렸다. 나이 차이를 그리 문..

미국 생활 2024.07.22

엔지 할머니

에어컨 덕분에 시원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대로 동네 한 바퀴를 걷기 시작했는데 좀 더웠다. 덥다 못해 피부에 와닿는 햇살이 따가웠다.머리에 쓴 모자만 믿고 조금 걷다 보니 너무 더워서 포기할까, 말까 하고 갈등을 느끼는데, 마침 담배 피우러 집밖에 나와 있던 엔지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대강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스티브, 이 미친놈아.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당장 걷는 거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 당장.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구시렁구시렁……”계속 걷기에는 더위보다는 할머니 욕설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뒤로 전진해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야, 이거 받아!”라는 고함이 들려서 돌아보니 바로 엔지 ..

미국 생활 2024.06.22

메리라는 여자

얼마 전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이웃 영감이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당신 메리라는 여자 알지?”“알다마다요. 패션모델 출신이었다는 여자 말이지요?”노인들이 사는 콘도 단지에서 60대 초반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아직도 뒤태에 눈길이 끌리게 하는 패션모델 출신 독신 여성은 동네 영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그 여자, 좀 이상한 여자야. 말 섞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몇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길을 휙 지나가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을 만나도 거의 아는 체하지 않고 언제나 밀짚모자 같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집 앞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을 때 말고는 오래된 현대 엘란트라와 시간을 보낸다.차에 덮개를 씌우..

미국 생활 2024.06.19

바람피운 남편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되어서

아침 산책길에 85세인 중국 태생 할머니 헬렌을 만났다. 외출복을 입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어쩐지 쑥스러워하더니 외출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오늘이 딸들 아버지 49재 날이라서 무덤에 가려고 하던 참이야. 당신, 49재가 뭔지 알지?”“알다마다요. 전 남편이 오늘까지는 지상에 머무르다가 내일이면 천국으로 떠나겠네요?”“전 남편이라기보다는 애들 아빠지. 밤새 무덤에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 한숨도 못 잤어. 그런데 떨어져 사는 딸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무덤에 꽃이라도 두고 오려고 해.”그녀는 기독교 신자라서 49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지만, 20여 년 전에 바람피우다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그 여자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

미국 생활 2024.06.09

미국 은행원

며칠 전 온라인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하는 데 오래전에 발행한 수표가 입금된 게 보였다. 번호도 오래전 것이고, 수취인 성명도 없고, 수표 영상도 볼 수 없었다. 금액이 많지는 않았지만, 혹시 사기꾼의 짓이 아닌지 부쩍 의심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기꾼이 큰 금액의 돈을 빼 가서 해결하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지인의 얘기가 생각나며 불안해졌다. 은행에 연락하여 확인해 보니 거의 4년 전에 친척에게 축하 선물로 준 수표였다. 선물로 받은 수표를 인제야 입금한 그 친척도 어지간하지만, 180일 넘은 수표는 무효로 간주해야 하는데 4년이나 된 수표를 입금 처리한 은행도 멍청하다.오래전 직장에 다닐 때 부하 직원이 내 사인을 받기 위해 책상에 둔 400여 장의 수표를 바빠서 미처 사인하지 않은..

미국 생활 2024.06.01

이웃 할머니 돕기

아내가 산책에서 돌아와서, 오는 길에 이웃에 혼자 사는 중국인 할머니(85세)를 만났더니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답답해하더라고 했다. 종일 유튜브 시청하는 걸로 소일거리 삼는 분인데 내가 도와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체육관에서 다녀와서 그 할머니 댁을 찾아보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까마득하게 높고 경사가 급해서 나같이 의족 끼고 지내는 사람이 오르려니 정신이 아득했다.계단을 올라 식탁에 앉으니,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내놓으며 모두 유튜브가 안 된다고 했다. 침실에 있는 노트북도 안되고. 아니 고령의 할머니가 왜 이리 전자 기기기 이리 많담.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유튜브 시청 말고는 이메일조차 사용할 줄 모른다니 그럴 수밖에.그래도 몽땅 유튜브가 안 나온다니 이건 분명히 인..

미국 생활 2024.05.31

나이 들어서 혼자 살기

늘 코에 휴대용 산소 공급기의 파이프를 꽂고 다니는 이웃집 조앤(Joanne) 할머니의 둘째 아들 조(Joseph)가 앞뜰에 꽃을 심다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니날이라고 방문하며 사 들고 온 꽃을 뜰에 심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암으로 몇 년째 투병 중인데, 2년 전에 바닷가에서 낚시하다가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나눌 때보다는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길래 병세가 진전이 있었는지 물어보자, 손을 파도치듯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호전되었다가, 악화하였다가…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뭐.”라며 달관한 듯이 씨익 웃었다.  재작년 독립기념일에 바닷가에 가서 생선 튀김을 사 먹고 낚시터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웬 삐쩍 마른 사내가 나를 보더니 스티브 아니냐고 묻기에 “동네 안팎을 가..

미국 생활 2024.05.13

쟈니와 빌

오전이고 오후고 언제나 집 둘레길에서 눈에 띄는 호리호리한 동양인이 있다.깔끔한 외모에 무표정한 얼굴, 남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옷차림이라서 쉽게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던 그를 본 지 거의 5년이 다 되어 가는데 어저께 처음으로 서로 통성명을 했다. 어쩌다 딱 맞닥뜨리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나, 쟈니라고 합니다. 중국 태생의 은퇴 목사로서, 나이는 69세입니다. 아내의 이름은 그레이스라고 합니다. 당신 아내의 이름은 데레사라고 알고 있습니다만…….”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억양 없이 숨 가쁘게 말을 쏟아내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이 몇 년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니. “서부 영화 Johnny Guitar에 나오는 주인공 쟈..

미국 생활 2024.05.05

미국의 동네 의사

의사 중에서도 제일 자주 만나는 의사는 아무래도 동네 내과의사다.수많은 의사를 만나보니 세상에 요즘같이 첨단 장비로 증세를 잡아내는 시대에 특별히 용한 의사란 없고 진료 경험이 많아서 환자의 말을 잘 들어주고, 환자가 불안하지 않게 잘 설명해 주는 의사가 유능한 의사로 생각된다. 의사가 비교적 많고, 노인과 빈곤층에 대한 의료 제도가 잘 갖춰져 있는 미국에서는 병원 문턱이 그리 높지 않고, 의사들도 매우 친절하다. 중환자 말고는 용한 의사를 만나러 대학병원을 찾아 장시간 대기하는 미련한 환자는 별로 없고 대개는 편한 마음으로 동네 의사를 만난다. 의사가 불친절하거나, 성의가 없는데도 그 의사를 계속 만날 필요는 없으니, 개업의들도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편이다. 내과 의사들의 진료 시간은 대개 한 시간..

미국 생활 2024.04.26

잭과 록산느 부부

옆집 잭과 록산느 부부는 우리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콘도미니엄으로 이사 왔으니 서로 알게 된 지 6년 차가 되었다. 우리 부부와 비슷한 나이라서 친근감이 느껴져 만나면 가벼운 인사도 나누고 소피라는 이름의 늙은 개에게도 관심을 표하고 했다. 그런데 몇 년 사이에 소피는 늙고 병들어서 세상을 떠나 매기라는 이름의 어린 개를 새로 입양했다. 잭도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더니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 투석을 받으러 병원으로 행차한다. 아직은 힘겹게 운전하기는 하지만, 휠체어와 워커를 번갈아 사용하며 걷는 모습이 보기에 안쓰럽다. 아침마다 대개는 록산느가 목줄을 잡고 어린 개를 산책시키는데, 언젠가부터는 록산느도 지팡이나 워커를 짚고 힘겹게 걷기에 물어보니 양쪽 무릎이 아파서 걷는 게 힘들다고 한다. 부부가 모두 건..

미국 생활 2024.0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