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95

조앤 할머니

체육관에 가려고 집을 나서다가 조앤 할머니를 만났더니 손짓하며 할 말이 있으며 기다려 달라고 한다.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낀 채 며느리의 부축을 받는 모습이 마치 바싹 마른 가랑잎 같았다. 늘 쾌활한 큰아들 지미의 얼굴은 침통해 보였다. 얼마 전에 들은 말이 있기에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했다.“스티브, 조셉(작은아들)이 입원했어. 이번이 아마 마지막이 될 것 같아.”매사추세츠주에 사는 딸 내외도 얼마 전에 다녀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사는 큰아들 내외도 방문할 때마다 조셉의 병세가 심상치 않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아흔 가까이 된 할머니는 늘 산소호흡기를 끼고 지내지만, 건강은 그만그만한 것 같았다.조셉은 몇 년 전부터 암으로 투병 중이지만, 가끔 바닷가에서 낚시를 즐기며 지낸다고 했다.부모 ..

미국 생활 2024.08.14

적산전력계 검침 문제

며칠 전 이메일로 온 7월분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 달 치 전기 요금이 대개 $30~50였는데, 갑자기 $362로 치솟을 까닭이 없다. 대학교 때 전공과목 중 하나인 ‘전기계측’ 시간에 공부한 전력 사용량 측정기인 적산 전력계의 구조도 단순하여 고장이 날 일이 없다. 더구나 두 달 전에 아날로그식을 디지털식으로 바꾼 최신형인데 그 사이에 고장날 까닭이 없다. 분명히 검침원이 실수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1년간의 매달 전기 요금과 사용량 기록을 모았더니 그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전기 요금을 그대로 내고 그냥 두어도 잘못 부과된 요금은 앞으로의 검침을 통해 자동 정산될 거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냥 넘어가기는 싫었다. 설사 앞으로 몇 달 동안 요금을 내지 않고 넘어가더라도 $50..

미국 생활 2024.08.13

Garden State

뉴저지의 별명인 "Garden State"는 이 주가 오랫동안 과일과 채소의 주요 생산지였으며, 여전히 블루베리, 크랜베리, 토마토의 미국 내 제일가는 재배지 중 하나라는 데서 유래한다. 뉴저지의 토양과 기후는 다양한 식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하여 정원사와 농부 모두에게 인기 있는 곳이다. 이 별명은 1954년 뉴저지주 자동차 번호판에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뉴저지의 면적은 남한의 22.5%, 인구는 930만 명으로서 인구밀도는 남한과 거의 같다. 그래도 산이 별로 없고 가용 면적이 넓어서인지 한국처럼 비좁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한국과 기후가 비슷하지만, 장마철이 없고, 겨울에 눈이 마음먹고 내리면 무섭게 내린다. 봄과 가을이 한국보다는 짧다. 녹지대가 많고 동쪽으로는 대서양과 맞닿은해변이 이어..

미국 생활 2024.07.28

배불뚝이 이웃 영감

우리 이웃에 사는 작달막한 배불뚝이 영감은 아침마다 늙은 개와 함께 산책한다. 그의 아내가 가끔 터키를 방문했다고 말하더라니 거기 출신인가 보다. 그의 외동딸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맡기러 가끔 오곤하는데 우리 딸들보다 어려 보이는 걸로 보아 그 영감도 나보다 나이가 적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 영감과 나는 둘 다 무뚝뚝한 편이라 산책길에서 지나쳐도 마지 못해 ‘Good Morning!”이라는 인사를 주고받기는 해도 대개는 못 본 체한다. 그러니 이름도 모르고, 성도 당연히 모르고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른다.그런데 오늘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그 영감이 느닷없이 “Good Morning, YOUNG MAN!”이라고 인사했다. Young Man이라? 그 영감이 나를 어리게 본다는 얘기렸다. 나이 차이를 그리 문..

미국 생활 2024.07.22

엔지 할머니

에어컨 덕분에 시원한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습관대로 동네 한 바퀴를 걷기 시작했는데 좀 더웠다. 덥다 못해 피부에 와닿는 햇살이 따가웠다.머리에 쓴 모자만 믿고 조금 걷다 보니 너무 더워서 포기할까, 말까 하고 갈등을 느끼는데, 마침 담배 피우러 집밖에 나와 있던 엔지 할머니가 나를 보더니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대강 한국어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다. “스티브, 이 미친놈아. 너 죽으려고 환장했니? 당장 걷는 거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 당장. 이놈이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구시렁구시렁……”계속 걷기에는 더위보다는 할머니 욕설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바로 뒤로 전진해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돌아와서 문을 열려고 하는데 등 뒤에서, “야, 이거 받아!”라는 고함이 들려서 돌아보니 바로 엔지 ..

미국 생활 2024.06.22

메리라는 여자

얼마 전 아침 산책길에서 만난 이웃 영감이 느닷없이 말을 던졌다.“당신 메리라는 여자 알지?”“알다마다요. 패션모델 출신이었다는 여자 말이지요?”노인들이 사는 콘도 단지에서 60대 초반의 젊은 여성, 그것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아직도 뒤태에 눈길이 끌리게 하는 패션모델 출신 독신 여성은 동네 영감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그 여자, 좀 이상한 여자야. 말 섞지 않는 게 좋을 거야.”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몇 달에 한 번 정도는 자전거를 타고 동네 산책길을 휙 지나가기는 하지만, 동네 사람들을 만나도 거의 아는 체하지 않고 언제나 밀짚모자 같은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집 앞에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독서에 빠져 있을 때 말고는 오래된 현대 엘란트라와 시간을 보낸다.차에 덮개를 씌우..

미국 생활 2024.06.19

바람피운 남편이 아직도 용서가 안 되어서

아침 산책길에 85세인 중국 태생 할머니 헬렌을 만났다. 외출복을 입고 손에는 꽃다발을 들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어쩐지 쑥스러워하더니 외출하는 까닭을 설명했다.“오늘이 딸들 아버지 49재 날이라서 무덤에 가려고 하던 참이야. 당신, 49재가 뭔지 알지?”“알다마다요. 전 남편이 오늘까지는 지상에 머무르다가 내일이면 천국으로 떠나겠네요?”“전 남편이라기보다는 애들 아빠지. 밤새 무덤에 가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느라 잠 한숨도 못 잤어. 그런데 떨어져 사는 딸들이 꼭 가봐야 한다고 강요하니 어쩔 수 없이 무덤에 꽃이라도 두고 오려고 해.”그녀는 기독교 신자라서 49재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도 하지만, 20여 년 전에 바람피우다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해 살다가, 그 여자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떠..

미국 생활 2024.06.09

미국 은행원

며칠 전 온라인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하는 데 오래전에 발행한 수표가 입금된 게 보였다. 번호도 오래전 것이고, 수취인 성명도 없고, 수표 영상도 볼 수 없었다. 금액이 많지는 않았지만, 혹시 사기꾼의 짓이 아닌지 부쩍 의심이 들었다. 몇 년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기꾼이 큰 금액의 돈을 빼 가서 해결하느라 고생깨나 했다는 지인의 얘기가 생각나며 불안해졌다. 은행에 연락하여 확인해 보니 거의 4년 전에 친척에게 축하 선물로 준 수표였다. 선물로 받은 수표를 인제야 입금한 그 친척도 어지간하지만, 180일 넘은 수표는 무효로 간주해야 하는데 4년이나 된 수표를 입금 처리한 은행도 멍청하다.오래전 직장에 다닐 때 부하 직원이 내 사인을 받기 위해 책상에 둔 400여 장의 수표를 바빠서 미처 사인하지 않은..

미국 생활 2024.06.01

이웃 할머니 돕기

아내가 산책에서 돌아와서, 오는 길에 이웃에 혼자 사는 중국인 할머니(85세)를 만났더니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서 답답해하더라고 했다. 종일 유튜브 시청하는 걸로 소일거리 삼는 분인데 내가 도와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체육관에서 다녀와서 그 할머니 댁을 찾아보니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까마득하게 높고 경사가 급해서 나같이 의족 끼고 지내는 사람이 오르려니 정신이 아득했다.계단을 올라 식탁에 앉으니,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내놓으며 모두 유튜브가 안 된다고 했다. 침실에 있는 노트북도 안되고. 아니 고령의 할머니가 왜 이리 전자 기기기 이리 많담. 몇 가지 물어보았더니 아예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유튜브 시청 말고는 이메일조차 사용할 줄 모른다니 그럴 수밖에.그래도 몽땅 유튜브가 안 나온다니 이건 분명히 인..

미국 생활 2024.05.31

나이 들어서 혼자 살기

늘 코에 휴대용 산소 공급기의 파이프를 꽂고 다니는 이웃집 조앤(Joanne) 할머니의 둘째 아들 조(Joseph)가 앞뜰에 꽃을 심다가 나를 보자 반갑게 인사했다. 어머니날이라고 방문하며 사 들고 온 꽃을 뜰에 심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암으로 몇 년째 투병 중인데, 2년 전에 바닷가에서 낚시하다가 우연히 나를 알아보고는 인사를 나눌 때보다는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길래 병세가 진전이 있었는지 물어보자, 손을 파도치듯이 올렸다 내렸다 하면서 “오르락내리락, 호전되었다가, 악화하였다가…사는 게 다 그런 거지요 뭐.”라며 달관한 듯이 씨익 웃었다.  재작년 독립기념일에 바닷가에 가서 생선 튀김을 사 먹고 낚시터에서 바람을 쐬고 있는데 웬 삐쩍 마른 사내가 나를 보더니 스티브 아니냐고 묻기에 “동네 안팎을 가..

미국 생활 2024.0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