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95

핸디 맨 빌(Handyman Bill)

아침 일찍 변기 물을 내리는데 어쩐 일인지 잘 내려가지 않았다. “뚫어뻥”을 수없이 변기 배수구에 대고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해 보았지만, 물내려가는 속도가 무척 느렸다. 파이프 어딘가 막힌 듯했다. 그래서 인공 지능에 물어보고 시키는 대로 베이킹 소다와 식초 그리고 뜨거운 물을 변기에 붓고 한참 후에 물 내리기를 여러 차례 해 보았지만, 저녁때까지 반가운 소식은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우리 건너편 집에 사는 배불뚝이 핸디 맨(Handyman)집 을 찾았더니 그의 아내가 나와서 그 친구가 며칠 전에 뇌졸중이 와서 오른쪽 반신이 마비되었기에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했다. 도움을 청하러 갔다가 문병하고 돌아온 셈이다. 평소에 체중 관리부터 열심히 하며 건강에 신경 썼어야지. 잠시 망설이다..

미국 생활 2024.11.23

지적 장애인

내가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가는 체육관에 자주 오는 지적 장애인이 두어 명 있다. 그중 매우 뚱뚱한 여성 한 명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장애 정도가 심해 보인다. 기우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불안해 보이고, 서너 살 아기보다도 언어 구사력이 떨어져서 말하는 게 괴성을 지르는 것 같아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지만, 그녀를 뒤쫓아 다니며 보살피고 운동을 시키는 트레이너와는 어렵지 않게 소통하는 걸로 보인다. 사는 게 참 불편할 텐데도 그녀는 늘 미소를 짓거나 이유 없이 큰소리로 웃는다. 그러니 그녀가 체육관에 나타나면 무척 소란스럽다. 까닭 없이 실내를 휘젓고 다니고, 시도 때도 없이 큰 소리로 내지르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과 웃음소리 그리고 그녀를 계속 뒤쫓는 트레이너의 불안한 모습..

미국 생활 2024.11.13

이웃에 사는 조앤 할머니

이웃에 사는 조앤 할머니의 얼굴을 아는 동네 사람은 거의 없을 듯하다.어쩌다 고물 자동차로 식자재를 사 들고 오는 게 눈에 띄지만, 동네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늘 집 안에서 은둔하며 지낸다. 가끔 아들인 듯한 남자가 할머니 집에 잠시 머물렀다가 갈 뿐 사회생활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 오랫동안 할머니가 보이지 않아도 문밖에 가끔 아마존에서 온 소포나, 아들이 장을 보아준 듯한 종이 봉지 몇 개로 그분이 그 집에 살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서너 달 전부터 그녀의 모습도, 종이 봉지도 보이지 않고, 전기 요금이나 수도 요금이 연체되어 곧 차단될 거라는 경고문이 덧문 손잡이에 끼워져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다른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

미국 생활 2024.11.12

바닷가 식당

아주 오래전 같은 아파트에 살던 부부와 바닷가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했다.20대 후반, 30대 초반에 처음 만나 아이들과 함께 캠핑도 자주 갔었는데,이제는 모두 70대 노인이 되어 멀쩡한 사람이 없다.한창나이에는 밤새워 술 마셔도 끄떡없었고, 손바닥보다 훨씬 큰 두툼한 고기를 거침없이 씹어삼켰는데, 지금은 맥주 한 병을 놓고 찔끔거리고,  주문한 식사를 나누어 먹으며 깨작거리다가 남은 건 싸들고 온다.화제도 아이들 얘기가 아니라 몸 여기저기가 말썽부리는 시원치 않은 건강 얘기다.두 남자는 운전대에서 손 놓은 지 오래되어 이제는 어디 갈 때마다 운전대를 잡는 마님 눈치를 봐야 하니 서글프다.그래도 만나자는 말에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그 부부가 고맙다. -사진: 식당 바깥의 가을 장식-

미국 생활 2024.11.08

처음 만난 영감이 말을 걸어왔다

산책길에 처음 만난 영감이 말을 걸어왔다.그: “당신, 혼자 사슈?” (혼자 사는 게 불법인가?)얼핏 봐도 얼굴에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게 인상이 고약하다.나: “마누라가 있소만, 왜요? (이럴 때는 마님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 건가!^^)그: “앞으로는 마누라와 함께 걸으쇼. 걷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나: “걱정 마쇼. 이래 봬도 많은 돈 들여서 전문가에게 보행훈련을 받은 몸이요. 지난 20년 간 무사고 보행 기록도 있소.”그: “잘 걸을 수는 있겠지만, 갑자기 뇌일혈로 쓰러질 수도 있지 않소.” (정말 이 영감 염장 지르고 있네)나: “내가 당신보다 엄청 건강한 것 같소. 엊그제 검진 받았는데, 의사가 완벽한 건강체라고 했소. 그 의사 전화번호 드려?”그: ‘그래도 조심하는 게 좋겠소.” (정말..

미국 생활 2024.11.07

아내의 귀가

몇 주 전 산책길에 이웃 영감탱이(나보다 네 살 더 많은 백인)를 만났더니, “요즘 니 마눌님 안 보이네.”라고 물었다. 그래서 아내가 2주 예정으로 독일 여행 중이라는 얘기, 끼니때마다 밥 챙겨 먹기 귀찮다는 얘기, (운전을 못 하니) 꼼짝없이 갇혀 사는 답답함 등을 얘기한 적이 있었다.만나도 별로 할 얘기가 없던 그 영감은 그 후로는 만날 때마다 밥은 잘 챙겨 먹냐?, 마눌님이 언제 오냐? 왔냐, 돌아오니 좋냐? 라며 실실 웃으며 나를 놀리듯이 물었다. 밥 한 끼 사준다거나, 어디 바람 쐬러 데려간다거나 하지 않고, 입으로만 걱정해 주는 체 해서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았지만, 그 영감이 그리 밉지는 않았다. 그 영감도 뭐 그리 걱정해 주는 것 같지는 않았고 날씨 얘기 말고 달리 할 얘깃거리가 생겨서..

미국 생활 2024.11.04

베어마운틴을 다녀와서

베어 마운틴 뉴욕 주립공원은 허드슨강 서쪽 강둑에서 솟아오른 산에 자리 잡고 있다. 공원에는 넓은 운동장, 그늘진 피크닉 숲, 호수 및 강 낚시터, 수영장, 박물관과 동물원, 하이킹, 자전거, 크로스 컨트리 스키 트레일 등이 있다. 야외 링크에서는 10월 말부터 3월 중순까지 아이스 스케이팅을 즐길 수 있다. 베어 마운틴 꼭대기에 있는 퍼킨스 메모리얼 타워에서는 공원과 허드슨 하이랜드, 해리먼 주립공원의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전체적인 산 모양이 큰 곰이 웅크리고 있는 듯하다고 베어마운틴이라고 불린다고 하는데, 산세가 험준하지는 않은 편이다. 이사 오기 전에 오랫동안 살던 동네에서 ‘베어 마운틴 뉴욕 주립공원’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잊지 않을 만큼 찾던 산이었다. 그리 ..

미국 생활 2024.11.01

추 메이 할머니

‘추 메이’이웃에 사는 대만 출신 85세 할머니의 이름을 처음 듣고는 한국 여성 정치인의 이름과 거의 같아서 호감이 가지 않았다. 이름은 비슷하지만, 두루뭉술한 체격에 건들건들 걷는 모습, 그리고 아무렇게나 걸친 옷차림이 우리가 어려서 고국에서 대하던 중국 여성과 비슷해서 멀리서 보아도 영락없는 중국인으로 보였다. 이름이야 어떻든지 간에 가끔 얘기를 나눠보면 마음이 따뜻한 사람 같았다.엊그제 산책길에 만난 아내에게 직접 짠 모자 두 개가를 주더란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아내 것. 써 보니 내 머리에 딱 맞았다. 사실 내 거는 두 개를 짜 두었는데, 그 전날 산책길에서 나를 만나 내 머리통을 유심히 보았더니 생각보다 커 보여서 그중 큰 걸로 주는 거라고 했다.이름이 누구랑 비슷하면 어떤가? 건들건들 걸..

미국 생활 2024.09.06

비밀이 없는 세상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하는 체육관에 갈 때마다 만나게 되는 한국인이 여러 사람 있다. 대부분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분들이라 볼 때마다 간단한 안부 인사를 주고 받는다. 그 중에서도 M씨는 매일 빠짐 없이 출근해서 열심히 운동하는 모범생인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보이지 않더니 석 달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한국인들끼리 만날 때마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아픈가? 교통사고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혹시, 가족 간에 불화가 생기지는 않았을까? 체육관에 나오면 늘 만날 수 있던 사람이라 그의 연락처를 받아 둔 사람이 없었다. 관리 사무실에 물어 보았지만 사생활에 관한 거라 연락처를 알려 줄 수 없다고 한다. 답답해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고 구글에 그이 이름과 사는 동네 ..

미국 생활 2024.08.31

조셉이 세상을 떠났다

외출에서 돌아 오다가 이웃 할머니 조앤의 큰아들 지미가 차에서 내리는 걸 보았다.우리 부부를 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어저께 동생 조셉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이럴 때 쓰는 인사말 “I am sorry to hear about your loss.”도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머뭇거리는데,엄마가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큰 충격을 받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했다.몇 년 동안 암으로 고생했기에 어쩌면 죽음이 그의 고통을 덜어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40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조셉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두어 달 전에 만났을 때 조만간 키포트 바닷가 낚시터에서 보자고 했지만, 오랜 투병으로 병색이 짙은 그를 보며 그 약속을 지키기가 어려울 거로 생각하기는 했으니 막상 떠났다는 말을 들으니 ..

미국 생활 2024.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