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72

우리 이웃에 사는 백인 영감

우리 이웃에 사는 백인 영감의 차 뒤 범퍼에는 “나는 해병대 헌병 출신이다”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다. 그의 집 앞에 있는 작은 화단에는 크고 작은 성조기가 여남은 개나 꽃혀 있는데, 한쪽 끄트머리에는 조금 큰 성조기와 해병대 깃발이 일 년 내내 펄럭인다. 궁금해서 얼마 전에 언제, 얼마 동안 해병대원으로 복무했는지 물어 보았더니 겨우 2년, 그것도 아주 오래 전, 젊었을 때였다고 한다. 그런데도 해병대원이었음을 긍지로 여기고, 조국을 위해 복무했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애국심을 드러내는 그가 대단해 보였다. 미국인들은 제복을 입은 군인, 경찰, 소방관을 존경하며, 군 제대 후에도 연금, 의료 혜택 제공 등에 많은 배려를 해 준다. 그러니 그 영감이 군 경력을 그렇게 자랑스러워할 수밖에. 한국도 그런 사회가 되..

미국 생활 2023.05.01

나이 들면 모두 환자라던데

내가 L 목사를 처음 만난 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 온 직후였으니 4년 전이었다. 어느 날 체육관에서 운동하고 있는데 나보다 나이 조금 더 들어 보이고 점잖게 생긴 분이 혹시 한국인이냐고 물었다. 본인이 목사라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체육관에 나오는 다른 한국인에게서 그분이 근처에 있는 한국 교회에서 사목하다가 은퇴한 원로 목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이후 가끔 점심도 함께하고, 집에서 만든 음식도 나눠 먹고, 그분의 안내로 영어 공부도 함께 하며 자주 만나게 되었는데, 서로 다른 종교를 믿어도 그게 전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괜히 목사티를 내며 성경 말씀을 가르치려 든다든가, 가톨릭을 은근히 비난하며 개종을 권한다든가 하는 일 없이 오로지 일상적 얘기만 나누니 신앙이 다른 게 문제가 되려야 ..

미국 생활 2023.04.06

바닷가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바닷가 가까이 있는 식당에서 맛있는 해산물 요리를 즐겼다. 식대를 계산하려고 크레딧 카드를 주고서 받은 청구서를 보니 50여 달러를 Discount해 준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 온 손님이라서 그랬던 것 같은데 물어보지는 않았다. 가격대가 괜찮아서 선택한 식당인데 에누리까지 받으니 기분이 좋아서 팁을 25% 정도로 넉넉하게 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이틀 지나고 생각해 보니 더 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또 가면 그때 더 주어야 하겠다. 한국 식당도 밑반찬 종류를 줄인 점심 메뉴와 모두 갖춘 저녁 메뉴로 구분하여 두 가지 가격대를 적용하면 좋겠다. 한국 식당의 식대가 너무 비싸서 찾기가 망설여 질 때가 잦다. 때로는 젓가락도 대지 않은 밑반찬 값까지 지불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짓수가 지나치게 ..

미국 생활 2023.03.11

조앤 할머니의 가족

작년 독립기념일(7월 4일)에 콧구멍에 바람이나 넣을까 하고 바닷가를 찾았다. 산책을 마치고 낚시꾼들이 낚시하는 걸 구경하는데 깡마른 백인 남자가 나를 보고 아는 체했다. 우리 집에서 30분 거리니까 이웃 사람은 아닐 테고… “내가 이 친구를 언제 봤더라.”하고 기억을 되살려 보려고 애쓰는데 그 친구가 “당신 스티브 맞지?”라고 물었다. 아니 내 이름까지 아네. 내가 이렇게 유명한가? 아, 못 말리는 내 나르시시즘. 알고 보니 그 친구는 나와 같은 콘도에 사는 조앤(Joan) 할머니의 작은아들 조(Joe)였다. 그 할머니는 노환으로 호흡이 불편하여 외출할 때도 휴대용 산소호흡기에 의지하는 처지라 체격이 호리호리한 분이다. 조도 암으로 투병 중이라 몸이 허약하지만, 가끔 바닷가에 와서 낚시를 즐기며 마음 ..

미국 생활 2023.03.02

술가게에 다녀 오다

나이 들며 마시는 입맛이 달라졌는지 즐기는 주종이 와인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주량이 많이 줄고, 마시는 횟수도 줄었다. 고급술을 마시면 좋겠지만, 연금 생활자 처지에 그렇게 할 수가 없고, 입맛이 예민하지 않아 눈 감고 마시면 비싼 술과 싼 술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싼 술을 일부러 찾아서 사 마신다. 지난 주일 성당 미사를 마치고 오는 길에 작년에 문을 열었다는 대형 술 가게를 찾았다. 엄청나게 많은 술을 모두 살 수는 없으니, 싼 와인을 몇 병 사고 비싼 술과 한국 술 구경이나 좀 하려고 했다. 가게 입구에 들어서니 엄청나게 많은 술에 압도되는 느낌이었지만, 맨 앞 진열대에 쌓인 와인의 가격표를 보니 반가웠다. 제일 앞줄에 Under $3.00, 그다음 줄에 Under $4.00, Under $..

미국 생활 2023.02.10

제 이름은 스티브입니다

한 서너 달쯤 전이었나 보다. 체육관에서 의족을 벗어서 옆에 둔 채 운동 기구에 편안하게 앉아서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죽 뻗는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백인 남자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고, 운동하기 편한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May I introduce myself. My name is Steve.”(제 소개를 할까요. 제 이름은 스티브입니다)라고 하고 하기에 나도 얼결에 손을 내밀고, “I am glad to meet you. My name is Steve, too,”(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도 스티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미국에 산지 40년이 넘도록 여태까지 이렇게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 같다. 미국 ..

미국 생활 2023.02.05

바람은 왜 피워서

옆집에 사는 잭(Jack)이 당뇨로 인해 문제가 생겨서 여러 달 병원을 거쳐 재활원에 입원했다가 얼마 전에 퇴원했다. 몇 달 전에 엄지발가락을 잘랐다던데 이번에는 또 무슨 문제였을까?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 백인 남자인데 건강이 좋지 않아서 늘 안색이 창백하고 개를 끌고 걷는 게 힘겨워 보인다. 때로는 잭만큼이나 늙어 보이는 개가 어기적거리며 그를 끌고 가기도 한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이웃 남자 스캇(Scott)도 가슴이 답답하고 심장에 문제가 있다며 얼마 전에 구급차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오고 나서는 부쩍 늙어 보인다. 내 나이 또래의 노인들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길 들으면 나도 심란해진다. 잭에게서 재활원 얘기를 들으니 교통사고 후 석 달 동안의 재활원 입원 중에 만난 한국인 부부가 생각났다...

미국 생활 2022.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