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제 이름은 스티브입니다

삼척감자 2023. 2. 5. 22:04

한 서너 달쯤 전이었나 보다. 체육관에서 의족을 벗어서 옆에 둔 채 운동 기구에 편안하게 앉아서 상체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죽 뻗는 운동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백인 남자가 다가와서 손을 내밀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것 같았고, 운동하기 편한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가 “May I introduce myself. My name is Steve.”(제 소개를 할까요. 제 이름은 스티브입니다)라고 하고 하기에 나도 얼결에 손을 내밀고, “I am glad to meet you. My name is Steve, too,”(만나서 반갑습니다. 제 이름도 스티브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생각해 보니 미국에 산지 40년이 넘도록 여태까지 이렇게 격식을 갖춰 정중하게 인사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 같다. 미국 생활 40년이 넘도록 내가 만난 미국인들은 거의 모두가 처음 만나면 “Hi, I’m Josh. And you are?”(안녕하세요. 저는 조쉬라고 합니다. 당신 이름은 뭐지요?)라고 인사했는데. 이 남자는 무슨 까닭에 이렇게 정중히 인사했을까?

 

그와 나는 이름이 같아서(내 미국식 이름도 Steve) 그걸 화제 삼아 잠깐 얘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의족을 벗어 반쯤 절단된 내 맨다리가 드러난 게 신경이 쓰여서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성으로 얘기를 주고받았더니 그는 바로 다른 운동기구 있는 데로 가버렸다. 내가 대화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었나 보았다.

 

그다음 날부터 얼마 동안은 체육관에 가면 그 남자가 와 있는지 훑어보곤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놈이 그놈 같고, 이놈이 저놈 같아서 헷갈렸다. 그렇다고 확신도 없이 아무에게나 스티브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오늘 점잖게 생긴 미국인이 “Good afternoon, Steve.”라고 인사하기에 보았더니 바로 그가 그놈도 아니고 이놈 저놈도 아닌 그분, 바로 Steve였다. 나도 “Hello, Steve!”라고 인사하고 얼굴을 유심히 보았더니 체육관에서 가끔 보이던 사람이었다. 통성명하고 나서도 얼굴을 잊어서 모른 체 했으니 그가 나를 무례한 사람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국인들의 얼굴이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늘 얼굴 따로, 이름 따로 기억하니 그럴 수밖에. 그런데 미국인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정말 잘 기억한다. 처음 만나 통성명하고 시간이 좀 지나 다시 만날 때 내 이름을 잊지 않고 기억해서 불러주는데도 나는 그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끙끙거릴 때가 잦으니 민망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나보다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한 번 들은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나보다 몇 배 노력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나를 비롯한 한국인들은 얼굴과 이름을 기억하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나이나 학번 등에 따른 서열에 관심을 갖기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눈치껏 서열 정리에 필요한 정보를 이것저것 얻으려고 애쓰다가 정작 가장 중요한 정보인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서구권에도 서열 문화는 존재한다. 그러나 주로 공적인 부분에서만 서열이 존재할 뿐, 사적인 영역에서는 서열 의식이 거의 없는 것 같다. 동양권, 특히 일본은 서열 문화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한두 살 차이로 서열을 정하려는 정신 나간 문화는 전 세계에서 대한민국 한 곳밖에 없을 거라고 한다. 이제부터라도 사람을 처음 만날 때 나이를 짐작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이름부터 열심히 기억해야 하겠다.

 

(2023년 월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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