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생활

까칠녀 얘기

삼척감자 2025. 3. 30. 06:06

올해 나이 80이 된다는 이웃 영감이 나와 산책길에서 마주치면 그가 꺼내는 대화는 대개 정해져 있다.
첫째는 날씨 얘기. 둘째는 허리가 아파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 이 얘기를 할 때는 꼭 얼굴을 찌푸린다. 셋째는 근처에 사는 메리라는 좀 젊은 할머니 흉을 보는데, 그럴 때마다 그녀의 호칭은 까칠녀(사실은 ㅁㅊㄴ이라고 부르는데 조금 순화해서)이다.

오늘 아침에는 까칠녀 얘기를 먼저 꺼내었는데, 무슨 국가 기밀 얘기하듯이 목소리를 낮추고, 좌우를 둘러보며 얘기를 시작했는데, 내용이라야 늘 듣던 거라서 별 거 없다.
“조금 전에 까칠녀가 산책하는 걸 보았어. 자네 그녀를 보면 주의하게. 눈 마주치지 말고. 말 걸지 말게나. 알았지?”

그 영감과 까칠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녀가 이렇게 그의 입방아에 오를 일은 없어 보인다. 좀 유난스럽기는 하다. 시간 나는 대로 좀 오래된 현대 엘란트라를 롤스로이스 다루듯 애지중지하여 이틀이 멀다고 닦고 또 닦고, 후드 열어서 엔진 부위를 바람 쐬어주고, 차 전체에 덮개를 씌웠다가 열어주고, 다시 덮어주고 하는 게 좀 이상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현대 자동차에서 상을 받을지언정 시골영감에게 흉보일 일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귀신 잡는다는 해병대에서 헌병으로 복무했다는, 한때는 거칠었을 사나이가 나이 들어서 이웃 할머니 흉이나 보는 쪼잔한 영감으로 변한 건 무슨 까닭일까?

'미국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포도주 양조장에 다녀와서  (0) 2025.03.11
우리 동네 인터넷 사랑방  (0) 2025.03.01
나는 겨울이 참 싫다  (0) 2025.02.27
미국인만이 하는 15가지 관행  (0) 2025.02.26
달걀값이 왜 그렇게 올랐을까?  (0) 2025.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