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식당에 가서 병째로 포도주를 시키면 웨이터가 병마개를 따고 일행 중 누가 대표로 시음할 건지 묻는다. 대표 선수가 선정되면 웨이터는 잔에 포도주를 조금 따라서 정중한 태도로 시음자에게 건넨다. 그러면 대표 선수가 시음하고 나서 대개는 좋다고 의사 표시를 하면 웨이터는 함께 온 모든 사람에게 한 잔씩 정량을 따라준다. 나는 그런 적이 없지만, 간혹 외국인들은 시음 후 마음에 안 드니 다른 술로 바꿔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포도주 양조장에서 정식으로 시음하는 건 절차가 조금 복잡하다. 양조장에서 생산한 포도주 중에서 손님이 원하는 술 대여섯 가지를 한 병씩 앞에 둔다. 선택하는 술의 종류가 늘어나면 시음료를 추가로 내야 한다. 병마개는 이미 따져있다. 술의 특성을 설명한 설명서가 있을 때도 있지만, 대개는 직원이 잔에 술을 아주 조금씩 따라주며 술의 특성을 설명한다. 손님들 앞에는 물과 술잔 그리고 포도주를 뱉기 위한 빈 그릇이 놓인다. 따라준 술은 삼켜도 되지만, 대개는 빈 잔에 뱉는다. 시음은 취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하기 위한 걸로 여기기 대문이다. 따라서 술집이나 식당에서처럼 술 한 병을 통째로 오로지 취하기 위해서 마시고자 한다면 정중히 나가 달라는 요청을 받을 것이고, 손님이 그걸 거절한다면 분명히 쫓겨날 것이다.
포도주 시음은 (1) 색깔 보기 (2) 향기 맡기 (3) 입안에 넣었을 때의 느낌 (4) 마시고 난 후의 느낌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Sideways라는 영화에 포도주 양조장에서 주인공이 시음하면서 친구에게 설명하는 아래 대사를 보면 제대로 된 시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조금은 알게 될 것이다.
“포도주잔을 똑바로 들고 햇빛에 포도주를 비추어보게. 색상과 선명도를 보는 거지. 색깔이 짙은지, 옅은지, 수분과 당분이 함유된 정도를 보는 걸세. 그리고 잔의 테두리 쪽으로 색깔이 옅어지는 걸 보고 색깔의 진한 정도를 봐야 해. 그걸로 포도주가 얼마나 오래된 건지 알 수 있다네.
다음에는 코를 잔 속으로 들이밀어 넣고 냄새를 맡아 보게. 감귤 냄새가 조금 나는 것 같군. 딸기 냄새도 좀 나는 것 같고. 열대 과일 향이 나네. 아주 약해. 아주 약간 아스파라거스 향도 나는 것 같고. 에담 치즈 냄새가 풍기는 듯하기도 하고.
그러고 나서 잔을 내려놓고 포도주가 공기와 접촉하게 두게. 포도주를 산화시키는 거지. 향기를 가두는 것이 아주 중요해. 그리고 다시 냄새를 맡아 봐. 이제 마셔 봐야지. 이거 출고된 지 두 달 되었군.” (너무 길어서 요약 번역)
만약 주인공이 술이 입안에 있을 때의 느낌, 삼킬 때의 감각 그리고 삼키고 난 후의 느낌까지 읊어대며 시음론을 완성하고자 했다면 영화 대사가 지나치게 길어질 테니 이 정도에서 그쳤으니 망정이지 포도주에 대하여 잘 모르는 관객에게는 고역이었을 거다.
만약에 한국 식당에서 술에 대하여 잘 안다고 자부하는 손님이 종업원 앞에서 안동소주 한잔을 따라 놓고 색깔이 어떻고, 향기가 어떻고……라고 읊어대면 그 손님은 무사히 식사를 마칠 수 있을까? 아마도 Sideways 영화처럼 종업원의 존경스러운 눈길을 받기는커녕 “꼴값하고 자빠졌네. 원 재수가 없으려니……”라는 말을 듣고 쫓겨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작은딸의 안내로 이번에 Sideways에 나오는 Santa Ynez Valley의 어떤 양조장에 다녀왔다.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 나는 오르내림이 심한 깊은 골짜기가 있는 풍경이 인상적이었지만, 포도원은 으레 그렇듯이 삭막했다. 포도주 시음은 그냥 통과 의례로 여겼다.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포도주 종류에 따른 맛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었고, 아는 체 하기에는 포도주에 관한 내 지식이 대단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며 가며 본 깊은 골짜기 풍경과 작은딸과 나눈 영화 이야기만 기억에 남을 뿐 포도주 맛은 혀끝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여러 해 전에 큰딸의 안내로 다녀온 다녀온 코네티컷주와 뉴저지주 해변 근처의 시음장에서 맛본 포도주 맛도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고, 주변 경관도 삭막한 편이었다. 왜 포도주 양조장 주변은 모두 그리 삭막할까? 포도가 척박한 토질에서 잘 자라서 그럴까?
30년 전에 테네시주의 시골 마을인 린치버그에 있는 Jack Daniel’s 위스키 양조장에 다녀온 적이 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 동네는 술 판매와 공공장소에서의 음주가 금지된 Dry County에 속해 있어서 양조장에서는 시음도 할 수 없고, 술을 살 수도 없었지만, 양조장 구경은 할 수 있었다. 조그만 수영장만 한 엄청나게 큰 술통 여러 개에 가득 찬, 익어가는 술을 보는 건 인상적이라기 보다는 감격스러웠다. 술 익어가는 냄새가 어찌 그다지도 향기롭고 황홀하단 말인가? 통에 가득 찬 옥수수가 발효하며 보글보글 피어오르는 수많은 거품은 어찌 그다지도 아름다웠는지. 거기에 풍덩 빠진다면 취흥이 도도해서 물아일체(物我一體)에 빠져 신선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술통에서 나던 향기를 떠올리면 여인의 향기(Scent of a Woman)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즐기는 술로 잭 대니얼즈를 택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2018년 6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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