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82

몸과 마음의 환상통

며칠 동안 특별한 까닭도 없이 깊이 잠들지 못했더니 피곤했다. 간밤에는 모처럼 깊은 잠에 빠져있는데 다리가 계속 찌릿찌릿한 게 느껴졌다. 비몽사몽 간에 시계를 보니 두 시가 좀 넘은 새벽이었다. 열한 시에 잠자리에 들었으니 고작 세 시간 남짓 잔 셈이다. 다시 잠을 청했으나 전기 충격과도 같은 통증이 계속되어 편히 자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왼발 뒤꿈치 복판에 온 불청객이었다. 어쩌다 환상통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면 잠을 이루기 어렵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가 무릎에서 절단되었으니 내 왼쪽 다리에서 발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사라진 몸 일부에 생생한 통증을 느끼는 기분은 정말 허깨비에 홀린 것 같다. 그래서 환상통을 영어로 phantom pain이라고 하나 보다. 환상통이 찾아오면 물러가..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두 달 동안 자다가 깨보니

오늘이 교통사고를 당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해마다 오늘이 오면 내 제삿날을 맞은 것처럼 숙연한 마음으로 사고 날 때부터 다시 걷기까지의 과정을 되짚어 본다. 그렇게 하는 까닭은 새 생명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고,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신 분들 그리고 입원 중에 찾아 주신 분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다. 사고를 당하고 두 달 동안의 긴 잠에서 깨어나 보니,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고,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모든 게 꿈인지 현실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니 고통은 심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게 되었다. 왼쪽 다리는 절단되었고, 오른쪽 다리뼈는 여러 도막으로 부러져 있었고, 성대가 손상되어 목소리를 잃었고, 배에는 음식을 주입하기 위한 튜브가 연결되어 있었고..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가거라 환상통이여, 영원히 가거라

얼마 전에 ‘환상통’이라는 독일 영화를 보았다. 환상통이란 전쟁, 사고 또는 질병으로 신체에서 잘려나가거나 수술로 절단해 버려서 없어진 부위에서 나타나는 통증을 말한다. 왼쪽 다리가 절단된 나도 칼로 찌르는 듯한 환상통이 1년에 몇 차례씩 예고 없이 찾아오면 짧게는 열두어 시간, 길게는 사나흘씩 지속하는 고통에 시달리기에 이 영화에 깊이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화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처음 겪는 환상통이 고통스러워서 병상에서 몸부림치는 주인공을 보고 그의 가족과 의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지금 잘려나가서 없어진 다리 부분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그걸 환상통이라고 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증상입니다.”“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You prayed. I am here.

며칠 전에 “천국에서의 90분(90 Minutes in Heaven)”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단 파이퍼(Don Piper)라는 목사가 교통사고 직후의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을 쓴 책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인데, 줄거리를 읽어보고 천국이라는 단어에 끌려서 영화를 보게 된 게 아니라 교통사고라는 단어에 끌렸다. 그가 겪은 고통이 나 자신의 체험과 어쩐지 비슷할 것 같아서였다. 오래전에 직장 동료의 권유로 자칭 목사라는 펄시 콜레가 쓴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을 읽고 난 후로는 이런 종류의 책이나 영화에 흥미를 많이 잃어버렸다. 그가 다녀왔다는 천국은 도로가 빛나는 금으로 덮여 있었고, 자신이 들어가 살 아파트는 황금으로 지어져 있었고, 큰 성은 보석으로 장식되었더라는 황당무계한 ..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세상 끝까지 걸을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주일 아침 일찍 친척 어른들 두어 분과 함께 먼 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아버지와 같은 항렬인 친척 아저씨가 토지 문제로 분쟁이 생겼는데 평생 농사만 짓던 분이라 세상 물정에 어두워 펜대라도 잡아 본 아버지의 도움을 청한 것이다. 현지에 가서 지적도와 실제 토지를 비교해 보고 농토의 일부를 무단 사용하던 사람에게서 소작료를 받아내려고 작정한 그 아저씨의 뒤를 따라 길을 떠났다.  강원도 시골에서 자라서 일 이십 리 거리야 늘 걸어 다녔고 산을 탈 일도 잦았지만, 왕복 여덟 시간 거리는 어린 소년에게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사람이 걷다 보니 저절로 생겨난 듯한 산길은 두 사람이 비켜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좁았고 가도 가도 키 작은 소나무만 드문드문 보일 뿐 온통 붉은 흙이 드러난 산길을 ..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뜻밖에 쏟아진 은총

스물한 살,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스님이 두어 분밖에 없는 서울 근교의 작은 절에서 몇 주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스님들은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 세 시 정각에 일어나서 절 주위를 돌며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다. 나는 매일 새벽, 그 소리에 잠을 깨서 투덜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많던 젊은 나이였는지라 이른 새벽에 들리던 그 소리가 참 싫었고,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스님 노릇도 쉽지 않아 보였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한 나는 가끔 절단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통증이라고 하지만 못 견디게 아프지는 않고 찌릿 거리는 가벼운 전기 자극 같은 것이다. 반갑지 않은 통증이 밤중에 찾아오면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신문..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마누라야 물렀거라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성당 기도회에 가고 나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었다. 영화는 그리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아서 별로 집중하지 않고 건성으로 보던 참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음 대사가 귓전을 때렸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늙고 병든 화가를 방문한 이웃집 대학생이 걷는 게 부자유스러운 그에게 워커(Walker) 사용을 권했더니 짜증을 내는 장면이었다.  “이딴 거 말고 지팡이를 줘, 막대기말이야. 워커는 안 쓸 거야. 그건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이나 쓰는 거야.”“지팡이보다는 워커가 낫지 않아요?”“적군과 맞설 때 쓸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달란 말이야.” 워커는 바퀴 두 개와 밑받침 두 개, 아니면 바퀴만 네 개 달린 작고 가벼운 밀차 비슷한 건데 ..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의족만 끼면 불편 없이 살 수 있다던데요

‘600만 불의 사나이’란 유명한 미국 드라마가 있다. 우주 조종사로 일하다 사고로 팔, 다리 그리고 눈을 잃은 주인공이 생체공학 수술을 받고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인간이 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의 수술비용으로 600만 달러가 들었다고 ‘600만 불의 사나이’란 제목이 붙여졌다고 한다. 드라마가 제작된 게 70년대 후반이니 그동안의 물가 상승률을 고려할 때 지금 화폐 가치로는 2,400만 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정도 돈을 들인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 및 의료 수준으로는 아직 그런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고 수술 및 치료에 든 비용을 그간의 물가 상승률을 따져 지금 화폐 가치로 계산하면 거의 300만 불이 되니 나도 적지 않은 의료비를 썼지만, 초인적인 능력은커녕 다리 하나..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골프여 안녕

교통사고를 당하여 다리 하나를 절단한 후 오랫동안 병원과 재활원 신세를 졌다. 퇴원 후에는 매주 여러 번 재활원에 통원하며 장애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본격적인 생활 적응 훈련과 체력 강화 훈련을 받았는데, 휠체어 굴리기로 시작된 훈련이 절단된 다리에 의족을 끼고 쌍지팡이를 짚고 걷는 연습으로 마무리되었다. 적응 훈련에는 평지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 다른 사람 어깨 짚고 걷기, 실물 모형이 비치된 장소에서 은행 이용하기, 시장 보기, 그리고 부엌에서 일하는 연습 등 실생활에 적응하기 위한 반복 연습이 포함되었다. 재활 훈련을 모두 끝내고 집에서 독서로 소일하던 어느 날 ‘다리 절단 장애인 골프회’라는 곳에서 초대장을 받았다. 다리를 절단한 사람에게 골프 지도를 해 주고 회원들끼리 골프도 함께 즐기는 모임이..

교통사고 이후 2024.09.30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미국에 주재원으로 파견된 지 겨우 한 달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30여 년 전 1월 어느 매우 추운 날에 출장을 떠났다. 새벽에 뉴저지를 떠나 미시간 주, 트로이에 있는 K-Mart 본부를 방문하고 당일 오후에 오클라호마 주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있는 TG&Y 본부를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특별한 용무 없이 부임 인사를 위해 대형 거래처를 방문하는, 마음 가볍게 떠난 출장이었지만 신통치 않은 영어 때문에 적지 않게 신경이 쓰였고, 미국 사정에 익숙하지 않아 새벽에 택시 부르는 것부터 호텔에서 묵는 것까지 쉬운 일이 없었다. 아침에 미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이 모여 있다는 디트로이트의 공항에 내려 키가 후리후리하고 아름다운 백인 여자들이 두꺼운 고급 모피 코트를 입고 로비를 바쁘게 오가는 걸 보고 북쪽 지..

교통사고 이후 2024.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