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가거라 환상통이여, 영원히 가거라

삼척감자 2024. 9. 30. 11:07

얼마 전에 환상통이라는 독일 영화를 보았다. 환상통이란 전쟁, 사고 또는 질병으로 신체에서 잘려나가거나 수술로 절단해 버려서 없어진 부위에서 나타나는 통증을 말한다. 왼쪽 다리가 절단된 나도 칼로 찌르는 듯한 환상통이 1년에 몇 차례씩 예고 없이 찾아오면 짧게는 열두어 시간, 길게는 사나흘씩 지속하는 고통에 시달리기에 이 영화에 깊이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영화가 바로 내 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처음 겪는 환상통이 고통스러워서 병상에서 몸부림치는 주인공을 보고 그의 가족과 의사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다.

 

그는 지금 잘려나가서 없어진 다리 부분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겁니다. 그걸 환상통이라고 하는데, 지극히 정상적인 증상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수술 전, 사고 당시에 다리에 느낀 통증을 지금 그대로 느끼는 거랍니다.”

잘라낸 다리는 쓰레기통에서 썩어가고 있는데, 그게 환자를 괴롭히다니요? 정말 말도 안 돼.”

그 환상통이라는 게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환자를 괴롭힐까요?”

“6개월, 일 년, 아니면 평생 그럴 수도 있어요.”

 

환상통이라는 놈은 사고를 당한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잊을만하면 찾아와서 나를 괴롭힌다.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낮에는 그럭저럭 견딜만하지만,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다. 일반적인 진통제로는 그 고통을 다스릴 수 없어서 그놈이 알아서 물러가기를 기다리기란 참 힘들다. 전에 만난 의사들은 다들 환상통을 가라앉힐 수 있는 약이란 없다고 했다.

 

왼쪽 골반부터 다리를 통째로 잘랐다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에콰도르 출신 여자는 환상통이 찾아오면 두어 달씩 지속하는데 일 년 내내 환상통 없이 지낼 때가 드물다고 한다. 때로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다가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고 했다. 통증을 완화해 주는 처방약을 준비해 두지만, 부작용이 가볍지 않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며칠 후에 성당 일로 신자인 통증 전문의를 만난 자리에서 그 영화 생각이 나서 환상통으로 겪는 고통을 얘기하고 적당한 진통제를 알려달라고 했더니 처방전을 한 장 써주었다. 같은 약이라도 환자에 따라 듣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니, 여러 가지를 사용해 보고 맞는 걸 찾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는 말을 덧붙이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병을 사두었다.

 

약 복용에 따른 주의사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부작용으로는 졸음, 어지러움이 예상되니 반드시 잠자기 직전에 복용하고, 500명에 한 명 정도는 우울증 증상이 나타나고 자살 충동을 느낄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문이 적혀 있었다.

 

“500명에 하나라? 겨우 0.2%인데. 그러면 엄청나게 높은 이혼율을 보이는 결혼의 부작용과는 비교가 되지 않잖아. 부작용 무서워서 장가 못 가는 남자 보았어? 죽었다가 살아난 내가 자살할 리도 없고, 까짓 우울증이야 그 다음 날 술 한잔 하면 되는 거고.” 그렇게 아내에게 큰소리치고  다음에 환상통이 찾아오면 그 약을 먹어 보기로 했다. 아니, 환상통이 다시 찾아오지 않아 약 먹을 일이 없기를 바랐다.

 

그런데 약을 사 둔 지 며칠 후에 반갑지 않은 손님이 또 찾아왔다. 그날은 가까운 이웃끼리 저녁에 바닷가를 찾기로 한 날이었다. 보름이 며칠 지나지 않아 아직도 커다란 달이 뜨는 걸  지켜보며 마음껏 소리를 내지르고, 노래도 부르며, 큰 양푼이 넘치도록 라면을 끓여서 몰래 물병으로 위장해서 갖고 간 소주의 안주 겸 밤참으로 먹으며 찌는 듯한 더위를 시원한 바닷바람으로 날려버리기로 한 날이었다.

 

반찬이라고는 김치 한 가지일 테지만, 다정한 이웃과 밤바다에서 갖게 될 라면 파티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잔치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주 있지, 둥근 달 뜨지, 좋아하는 라면 있지, 분위기 죽여 주지왜 그렇지 않겠는가? 아침부터 배당된 준비물을 챙기고 함께 갈 가족과 떠날 시간을 다시 확인하고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점심 먹고 걷는데 왼쪽 다리의 절단 부위가 쓰렸다. 얼른 의족을 벗고 살펴보니 피부가 벗겨져 있었다. 다시 의족을 끼고 다시 걷는데 더 쓰렸다. 아무래도 모래밭을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얼른 앉아서 의족을 벗겨내고 알코올을 뿌리고, 보습제를 바르는데 심상치 않은 증세가 시작되었다.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환상적인 잔치고 뭐고 포기하고 얼른 집에 가서 며칠 전에 사둔 부작용이 조금 예상된다는 강력한 진통제를 시험할 생각뿐이었다.

 

빨리 아픔을 가라앉혀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 저녁에 약을 먹었다. 좀 있더니 머리가 몽롱해지고 아무 생각도 없어졌다. 아파트 복도를 걷는데 몸이 휘청거렸다. 이게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약효가 어땠느냐고? 효과가 있기는 했다. 병원 용어로 말하면 약 없이는 stabbing pain(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 level 8(10점 만점에 8) 정도였는데 약을 먹고는 3 정도로 떨어졌으니 말이다. 그래도 잠결에 가벼운 통증을 느끼니 단잠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통증은 그다음 날 오후에 간다는 말도 없이 슬그머니 사라졌고, 머리가 멍하고 졸리는 증상은 그때까지도 지속하였으니 약의 부작용이 심하기는 했다. 자살 충동 같은 건 못 느꼈으니 다행이랄까.

 

환상 축제에 참석했던 어느 분이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 주었다. 둥근 달이 둥실 뜬 아름다운 밤바다는 참 아름다웠고, 고추, 감자, 당근, 호박 등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몸을 풍덩 담근 가운데 맛있게 익어가는 커다란 라면 양푼을 보니 그 축제에 참석하지 못한 게 무척 아쉬웠다. 내가 없어서 소주가 많이 남았을 텐데혼자 입맛을 다셨다. (2016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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