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그러니까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스님이 두어 분밖에 없는 서울 근교의 작은 절에서 몇 주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스님들은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고 새벽 세 시 정각에 일어나서 절 주위를 돌며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다. 나는 매일 새벽, 그 소리에 잠을 깨서 투덜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많던 젊은 나이였는지라 이른 새벽에 들리던 그 소리가 참 싫었고,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스님 노릇도 쉽지 않아 보였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한 나는 가끔 절단 부위의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통증이라고 하지만 못 견디게 아프지는 않고 찌릿 거리는 가벼운 전기 자극 같은 것이다. 반갑지 않은 통증이 밤중에 찾아오면 일어나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으로 신문도 보고, 영화나 음악 감상도 하고, 독서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밀린 일을 하기도 하며 밤을 꼬박 새운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불면증으로 여러 달 시달린 적이 있었다. 매일 밤 한밤중에 잠이 깨면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려서 이불을 뒤집어써도 헛것이 보여서 밤을 꼬박 새우곤 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일없이 마루를 서성거리다가 어머니에 야단맞고는 잠자리로 돌아와 우두커니 앉아서 쌕쌕 숨소리를 고르게 내며 잠에 빠진 동생을 보면 괜히 얄미웠다. 그러다 동이 트는 기미가 보이면 일어나 집 앞 길거리를 헤매다 들어오곤 했다. 그러는 나를 보고 어머니는 둘째 아들이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걱정했다. 매일 밤 두어 시간밖에 못 자고 밤을 꼬박 새울 때는 참 고통스러웠다. 어린 나이에 무슨 고민이 많아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성장통이었을까?
젊었을 때는 푹 자고 나면 어지간한 피로는 사라졌는데, 나이 들어가며 그런 꿀잠을 맛본 지 오래되었다. 요즈음은 깊은 잠에 빠지기는 어려워서 아침에 일어나면 잔 둥 만 둥 일 때가 잦다. 그래도 새벽에 일어나는 게 어릴 적처럼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일찍 일어나 보고 싶었던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면 참 뿌듯하다. 이어폰을 끼고 젊었을 때 즐겨 듣던 팝송을 찾아서 다시 들어 보는 것도 즐겁다. 드물기는 하지만, 시간이 나질 않아서 미뤄두었던 일을 마치면 새벽잠 설치며 일찍 일어난 보람을 느끼기까지 한다.
작년 여름 어느 날 밤, 자정을 조금 넘겨서 잠이 깼다. 잠을 다시 청해 보려고 두 시간 가까이 애쓰다가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인터넷 세상을 오가다가 갑자기 일거리 하나가 생각났다. 신부님이 부탁한 전례에 관한 강의 자료 번역이었다. 교구에서 보내 준 8쪽짜리 지침서였는데 급하지 않으니 시간 날 때 천천히 손대려고 미뤄 둔 것이었다. 삼라만상이 잠들어 고요한 새벽에 정신 집중이 잘 되어서였는지 몇 시간 만에 번역을 마칠 수 있었다.
두어 주 전에도 세시쯤 일어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일어나자마자 수녀님이 부탁한 일거리가 생각났다. 두꺼운 예식서에서 필요한 부분을 발췌 정리한 다음 다시 배열해서 작은 책자 두 권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이게 은근히 까다로워서 선뜻 손대지 못하고 미뤄두었었다. 여러 시간에 걸쳐서 그 작업을 끝내니 아침에 마시는 커피 맛이 달았다.
잠을 설치기는 해도 새벽에 일어나 미루어 두었던 일을 마치고 나면 참 기분이 상쾌하고, 덤으로 몇 시간 더 번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이런 게 뜻밖에 쏟아진 은총이 아닐까?
(2015년 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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