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마누라야 물렀거라

삼척감자 2024. 9. 30. 11:04

크리스마스도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저녁. 아내는 성당 기도회에 가고 나는 크리스마스에 관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있었다. 영화는 그리 재미있지도, 감동적이지도 않아서 별로 집중하지 않고 건성으로 보던 참이었는데 어느 순간 다음 대사가 귓전을 때렸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 사는 늙고 병든 화가를 방문한 이웃집 대학생이 걷는 게 부자유스러운 그에게 워커(Walker) 사용을 권했더니 짜증을 내는 장면이었다.

 

이딴 거 말고 지팡이를 줘, 막대기말이야. 워커는 안 쓸 거야. 그건 죽을 날이 가까운 늙은이나 쓰는 거야.”

지팡이보다는 워커가 낫지 않아요?”

적군과 맞설 때 쓸 수 있는 그런 무기를 달란 말이야.”

 

워커는 바퀴 두 개와 밑받침 두 개, 아니면 바퀴만 네 개 달린 작고 가벼운 밀차 비슷한 건데 보행이 힘든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균형을 잡으며 걸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보행 보조 장치다. 나도 휠체어를 사용하다가 의족을 낀 이후에 그걸 반년 정도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이걸 굴리며 걸으면 안전하기는 한데 상체를 심하게 구부리고 걷는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 않고, 평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장애인 티가 너무 나게 하는 물건이어서 나도 사용하기를 꺼렸다. 그렇지만 지팡이보다는 안전하고 사용하기도 편해서 우리 아파트에 사는 노인들도 이걸 많이 사용한다.

 

영화에서 늙고 기력이 매우 떨어진 화가가 워커를 거부하고 지팡이를 달라고 고집을 부렸는데, 나처럼 휠체어, 워커 그리고 지팡이(정확하게는 forearm crutch, 일종의 목발)를 모두 써 본 사람은 그 장면에서 느꼈을 그 화가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어!” 라는 객기 말이다.

 

우리 아파트에 살던 어느 퇴역 상이군인 한 분은 스쿠터를 타고 아파트 복도를 쌩쌩 달렸는데, 외출할 때는 밴에 그걸 싣고 다녔다. 다리가 불편해도 스쿠터 덕분에 집 안팎에서의 일상생활에 별 불편이 없다고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처럼 뻐기던 그가 부러워서 값을 알아보았더니 내 의족 한 개 값으로 그걸 열 대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비싸지는 않았지만, 조립과 분해가 번거롭고 무게가 꽤 무거워서 보통 승용차 트렁크에 싣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스쿠터를 싣거나 내릴 때마다 경사로를 펼치고 접는 장치가 설치된 장애인용 특수 차량을 사면 그런 문제가 해결되지만, 그 비용이 엄청나다. 그래서 스쿠터는 잊기로 했다.

 

여행 중에 어쩔 수 없이 휠체어를 사용할 때가 있다. 슬슬 쉽게 굴릴 수 있을 것 같은 휠체어도 굴려보면  힘이 많이 든다. 평탄한 마루바닥에서는 쉽게 굴릴 수 있는데 경사지거나 고르지 않은 바닥에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야외에서는 반드시 누군가가 밀어 주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비실거리는 아내가 밀어 주면 더욱 그렇다.   

 

코스트코(Costco)에 갈 때마다 입구에 비치된 전동식 샤핑 카트에 눈길이 갔다. 가끔 그걸 타라고 권하는 점원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사양했다. 편하기는 하겠지만, 장애인이라고 내세우는 게 싫기도 했고 힘들어도 운동삼아 걸어서 매장을 둘러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넓은 매장을 걷기란 힘들어서 으레 가장 관심이 있는 전자제품이나 책이 진열된 코너만 들르고는 앉아서 쉬곤했다.

 

얼마 전에 웨그만(Wegman)이라는 대형 슈퍼마켓에 갔을 때였다. 그날따라 왼쪽 다리의 절단된 부위가 짓물러서 걸을 때마다 몹시 쓰렸다. 그래서 입구에 비치된 전동식 샤핑카트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올라탔다. 손잡이 오른쪽을 당기면 앞으로 가고, 왼쪽을 당기면 경고음이 울리며 뒤로 가고, 돌리면 회전하고, 손을 떼면 서고, 운전이 그렇게 쉬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앞에는 장바구니까지 부착되어 있으니 혼자서도 충분히 장을 볼 수 있었다.

 

넓은 매장 구석구석까지 서너 바퀴 돌아보니 신이 났다. 굴릴 때마다 주눅 들게 만드는 휠체어와는 달리 씽씽 달리는 이 탈것은 골프 카트를 탄 것처럼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이것만 있으면 마누라 도움없이도 장 볼 수 있겠네. 랄랄라라.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마누라야 물렀거라, 비켰거라. 이 몸이 행차하신다.” 신나게 여기저기 달리다가 마누라가 운전해 주지 않으면 장 보러 올 수가 없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아이쿠 마누라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게 그리 쉽지 않구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틈틈이 걸으며, 하나 남은 다리나 길이 보전하여 이 세상 떠날 때까지 휠체어도, 워커도 사용하지 않고 쌍지팡이로 굳세게 버틸 궁리나 해야겠다. (2014 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