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삼척감자 2024. 9. 30. 11:01

미국에 주재원으로 파견된 지 겨우 한 달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30여 년 전 1월 어느 매우 추운 날에 출장을 떠났다. 새벽에 뉴저지를 떠나 미시간 주, 트로이에 있는 K-Mart 본부를 방문하고 당일 오후에 오클라호마 주의 오클라호마 시티에 있는 TG&Y 본부를 방문하는 강행군이었다. 특별한 용무 없이 부임 인사를 위해 대형 거래처를 방문하는, 마음 가볍게 떠난 출장이었지만 신통치 않은 영어 때문에 적지 않게 신경이 쓰였고, 미국 사정에 익숙하지 않아 새벽에 택시 부르는 것부터 호텔에서 묵는 것까지 쉬운 일이 없었다.

 

아침에 미국 유수의 자동차 회사들이 모여 있다는 디트로이트의 공항에 내려 키가 후리후리하고 아름다운 백인 여자들이 두꺼운 고급 모피 코트를 입고 로비를 바쁘게 오가는 걸 보고 북쪽 지방이라 뉴저지보다 날씨가 더 추운가 보다 했다. 공항과 K-Mart를 택시로 오가며 느낀 바깥 날씨는 뉴저지보다 훨씬 매서웠다.

 

오후에 남부 지방의 오클라호마 시티 공항에 내려보니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여름 옷차림을 하고 있어서 겨울 정장 위에 레인 코트를 걸친 내 옷차림과 대조가 되었다. 거래처 사무실에 들어서니 더운 날씨에 선풍기가 한가롭게 돌아가고 반소매 셔츠 차림으로 나를 맞는 직원들의 모습이 나른한 여름 풍경이었다. 하루에 겨울과 여름 날씨를 겪어 보니 미국이라는 나라의 땅덩어리가 정말 크기는 크구나 싶었다. 

 

“미국은 북극에 가까운 알래스카 주부터 적도에 가까운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까지 그야말로 지구에 있는 모든 기후와 지형을 다 가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기후는 지역에 따라 상당한 변화를 볼 수 있으나, 온대기후의 지역이 가장 많고, 북부엔 냉대기후, 남부인 플로리다 반도에는 아열대 기후, 서부의 내륙지방에는 사막기후도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장맛비는 볼 수 없다.” (위키피디어에서

 

미국에 오래 살아서 이제는 지역에 따라서 날씨가 무척 다르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한겨울 추운 날씨에 따뜻한 지방으로 여행하면 날씨가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직도 신기하다. 젊었을 적에 남부 지방에 3년 정도 살아 보았는데, 일 년 내내 계속되는 나른한 날씨가 참 따분했다. 뉴저지 지방에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면 눈 덮인 풍경이 그리워져서 일과 후에 골프장에서 골프백을 끌며 투덜거렸다. “여기서는 일 년 내내 골프 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너무 없어. 눈도 안 내리고. 얼른 보따리 싸들고 뉴저지로 가든지 해야지.”라고.

 

퇴사하고 뉴저지로 되돌아 와서 지금까지 살아오며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의 구분이 비교적 확실하여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풍광을 즐기며 지냈다. 내가 미국에서 오래 지낸 뉴저지 주와 인구가 많은 뉴욕, 보스턴, 필라델피아 등의 대도시가 모여 있는  미국 동북부 지방은 해안을 따라 아팔라치안 산맥이 지나가고 대서양을 끼고 있어서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더우며, 비가 약간 적은 것 말고는 한국의 중부지방과 비슷한 날씨이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오고 사계절이 분명하지만 봄과 가을이 짧은 편이어서 겨울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겨울로 바로 바뀌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라는 연극이 있다. 제목이 재미 있어서 기억하고 있지만 내용은 잘 모른다. 회사에 다닐 때는 입바른 소리 잘 하고 자잘한 일에도 쓸 데 없는 고집을 부리고, 융통성 없는 성격마저 소신이라고 우기며 나야말로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이 결코 아니라고 자부했다.

 

한창 때는 일 년에 네 차례 계절이 바뀌어도, 비바람이 몰아치고 폭설이 쏟아쳐도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교통사고로 몸이 망가지고 거기다 나이가 들어가니 몸이 날씨에 따라 변하는 걸 느낀다. 비가 내리거나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에는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기온이 뚝 떨어지면 기운도 떨어져서 몸이 축 쳐지고 우울해진다. 그래서 날씨가 추워지면 일년 내내 온화한 날씨가 계속된다는 남부지방을 그리워한다. 나이 들어가며 비실거리는 아내도 추운 날에는 대책없이 따뜻한 남쪽 지방으로 이사하자고 졸라대서 염장을 지른다. “아니, 이 나이에 낯선 곳으로 옮기면 누구랑 놀 것이며, 예쁜 두 딸과 외손녀, 외손자가 보고 싶어서 어찌하려고. 차라리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는 게 낫지.”라고 소리 지르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런 말에 대꾸도 하지 않는다.   

 

이제는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요즈음 그게 슬프다. (2014년 11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