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왕이로소이다.’는 거의 90년 전에 홍사용 시인이 발표한 시의 제목이다. 내가 요즈음 아내에게 가끔 하는 싱거운 말인 ‘나는 왕자로소이다.’는 홍사용 시인의 시와 아주 다른 내용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파트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먼저 내려서 몇 걸음 걸어가던 남자가 얼른 되돌아와서 엘리베이터 문을 잡고 내가 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내가 있었더라면, “내 신분이 드러난 것 아니야? 아무래도 저 사람, 내가 왕자인 걸 아는 눈치던데.”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별로 잘 난 데가 없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던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고 쌍크러치를 짚고부터는 어딜 가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다. 어디서든 건물이나 방에 드나들 때는 어디에서인가 나타나 문을 열고 손잡이를 잡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서비스를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는 점잖게, “고맙습니다.”하고 치하하면 된다. 때로는 “좋은 하루 보내세요.”하고 왕자답게, 품위 있게 덧붙이기도 한다.
길을 건널 때도 어디선가 나타난 사람이 길 한복판에서 팔을 번쩍 들고는 내가 다 건널 때까지 양방향의 차량을 통제할 때도 있다. “동궁 마마, 제발 천천히 건너시옵소서.”라고 말하는 걸 들은 것도 같다. 그 사람은 비밀 경호원일까? 다음에 또 그러면 너무 드러나지 않게 경호하라고 주의를 줘야겠네.
큰 식당이나 샤핑 몰에 가면 입구 가까운 쪽에 있는 주차장이 비어 있을 때가 별로 없다. 그런데도 출입구 바로 앞에 있는 장애인용 주차장은 비어 있을 때가 잦다. 그런 자리에 주차할 때마다 나는 아내에게 뻐긴다. “거봐, 이래도 내가 왕자란 걸 못 믿겠어?” 이제는 그런 특별 대접이 몸에 배어서 당연한 듯이 받아들인다
하루에 여러 차례 그런 말을 들으면 아내가 빈정거리기도 한다. “왕자는 무슨, 거지 왕자가 아니요?” 그럴 때마다 나는 거지가 왕자인 체하는 게 아니라 왕자가 거지인 체하는 거라고 우긴다. 아내는 내가 왕자란 걸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그런 편의를 받는 게 내 덕분인 건 인정하는 눈치다.
길게 늘어선 줄 뒤에 서 있을 때도 나를 알아본 사람들이 맨 앞으로 가기를 권하면 나는 아내에게, “거봐, 다들 내가 누구인지 알잖아. 나 왕자가 맞다니까.” 미국 대통령도 뷔페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던데 나는 언제나 특별 대접을 받으니 내가 지위가 더 높다니까. 어쩌다 나를 몰라보고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취급하는 곳에서 나는 짜증을 낸다. “이참에 내 신분을 확 까발려 버려?”
홍사용의 시는 이렇게 끝맺는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어머니의 외아들 나는 이렇게 왕이로소이다. 그러나 눈물의 왕-이 세상 어느 곳에든지 설움이 있는 땅은 모두 왕의 나라로소이다.” 그러고 보니 이 시는 나를 두고 읊은 게 아니고, 혹시 예수님을 두고 읊은 시가 아니었을까?
가족에게 절대 왕권을 행사하던 우리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는데 왜 나는 아직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 걸까? 이제는 아내도 왕자비가 아니라 중전마마 대접을 받아야 할 텐데.
(2014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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