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내 왼쪽 다리를 절단하며 뼈를 둥그렇게 다듬었는데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던지 일부가 볼록하게 튀어나와서 의족을 착용하면 그 부분의 피부가 잘 상한다. 절단으로 뼈가 드러난 부분에는 허벅지 살을 떼어서 이식하였는데 별로 아름답지도 않고 색깔도 거무죽죽한데 아무래도 이식한 피부가 약해서 의족을 오래 끼고 있으면 아프기도 하지만 짓무르거나 상하는 일이 잦다.
아주 드물게는 절단 부분이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찌릿거려서 매우 고통스럽다. 일단 찌릿거리기 시작하면 비명이 저절로 나올 정도인데다가 제법 오래 가므로 밤에 그런 일이 생기면 잠자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한다. 그럴 때는 통증이 어서 지나가도록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대책이 없다.
오늘도 외출에서 돌아와 낮잠을 자는데 느닷없이 다리가 찌릿거리기 시작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이번에는 그게 두어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오래전에 교통사고가 일어난 바로 그날이다. 다리가 기념행사를 하는 거려니 하고 참고 견디다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작년 오늘에 쓴 글을 찾아보니 작년에도 같은 날에 절단된 왼쪽 다리가 밤새 찌릿거리고 망가진 오른쪽 다리에 쥐가 나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혀 있다. 두 다리가 알아서 그날이 되면 기념행사를 요란스럽게 치르나 보다.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통증도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갑자기 사라진다. 예고 없이 찾아와서 예고 없이 떠나는 셈이다. 반가운 손님은 아니지만 그래도 통증이라는 손님이 찾아왔다가 떠나면 평소에는 말썽부리지 않는 다리가 새삼 고마워진다.
절단된 다리에 의족을 끼우고 크러치 두 개에 의지하여 지낸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도 장애인의 삶에 적응이 안 된다. 어쩌면 죽을 때까지 적응하지 못하여 사고 이전의 삶, 건강한 두 다리로 지내던 50여 년 간의 삶을 그리워하며 지낼 것이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꿈에서는 단 한 번도 쌍크러치를 짚고 절룩거리며 걸어 본 적이 없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세월을 오가는 꿈속에서는 사고 이전처럼 늘 건강한 두 다리로 지낸다. 그래서 꿈에서 깨어 이불자락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온전치 못한 다리를 보면 가슴이 무너지는 것처럼 어이없고 허무하다.
"어느 날 장주(莊周=장자의 본명)가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어 유유자적 지내면서도 자신이 나비인 줄로 착각하여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 보니 다시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나비가 장주가 되는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장주는 꿈에서 깬 상태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꿈 안에서 나비였음을 깨닫는다. 꿈속에서 나비인 상태로 유유자적할 때에는 그저 나비로서 존재할 뿐, 자신이 나비라는 자각이 없다. 그래서 나비였을 때는 '나(我)'가 없다. '나'가 없으니 타자도 없다. '나'와 타자가 없으니 자연히 소통도 없다. 그저 나비로서 자연스럽게 존재할 뿐이다. 장주와 나비는 별개의 것이건만 그 구별이 애매한 건 사물이 변화하기 때문이다.” 장자(莊子)의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글이다.
이 글을 보면 장주가 나비고 나비가 장주며, 꿈이 현실이고 현실이 꿈이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과거의 나’가 ‘지금의 나’고, ‘지금의 나’또한 ‘과거의 나’이며, ‘두 다리가 멀쩡한 나’가 ‘다리 하나 잃은 나’고, ‘다리 하나 잃은 나’가 ‘두 다리 멀쩡한 나’라는 얘기도 되겠다. 이해하기가 어려운 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변화하는 사물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안히 가져야 하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냥 그런 정도로 받아들여야지 도가(道家) 사상의 핵심인 이 글을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실천하여 도사가 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니겠는가?
(2014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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