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 후 운동하러 아파트 로비 옆에 있는 체육관으로 가는데 우편물 보관실 카운터에 놓인 카드 석 장이 눈에 띄었다. 누가 세상을 떠나거나 입원하면 아파트 주민 누구라도 가족이나 본인에게 위로나 격려의 말을 적어서 전하도록 카운터 위에 카드를 놓아 두는데, 입주자 대부분이 나이 드신 분들이라 70여 세대밖에 살지 않는 우리 건물이지만, 그런 카드가 자주 놓인다. 대개는 한 장씩 놓이는데 이번에는 한꺼번에 석 장이나 보여서 궁금한 마음에 카드를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왼쪽 카드는 “케빈, 퇴원을 축하합니다. 이제는 푹 쉬며 인생을 즐기세요.” 이런 문구가 씌어 있었는데, 케빈 할아버지가 누구더라? 혹시 늘 휴대용 산소 호흡기를 끼고 지내는 1층에 사는 할아버지가 아닐까? 아무튼, 위급한 상황을 넘기고 병원에서 아파트로 다시 돌아왔다니 다행이다.
가운데에는 곧 입원할 다티 할머니에게 무사 귀환을 기원하는 카드였다. 어저께만 해도 활기차게 복도를 걷는 걸 봤는데, 별일은 아니겠지. 이 할머니는 우리 이웃에 사는데 우리 아파트의 공용 게시판 노릇을 하느라 이집저집 다니며 동네 소문을 물어 나르기에 바쁘다. 언젠가 우리 앞집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기에 그런 줄 알았더니 몇 주 지나서 복도에서 멀쩡하게 살아있는 그 할아버지를 만나 깜짝 놀랐다. 그게 부활을 믿는 계기가 되었지만, 다티 할머니의 말이 그다지 믿을만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이 90인데도 늘 바쁜 할머니라 병원에서도 가만있지 못하고 간호사 성질깨나 건드리겠지.
며칠 전에 입원한 우리 옆집 아일린 할머니의 쾌유를 기원하는 카드는 오른쪽에 있었다. 나이 90이 넘은 분이 아침마다 현관에 배달된 신문 뭉치를 분류해서 집집이 날라 준다. 운동 삼아 하는 일이겠지만, 이른 아침에 1층에서 3층까지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직접 아침 일찍 현관에 가서 신문을 가져오려니 참 귀찮다. 할머니가 빨리 퇴원해서 신문을 갖다 주면 나도 편할 텐데.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아침마다 신문을 가져오려니 짜증스럽다. 할머니가 부디 오래 살며 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계속 신문을 배달해 주면 좋겠다.
나이 드신 분들이라 그런지 갑자기 건강이 악화하여 급히 구급차에 실려가도 환자나 가족들의 표정은 대개 평온하다. 늘 노환으로 고생하니 몸이 아픈 게 일상화되었기도 하겠지만 나이 들어서 아픈 걸 병으로 보지 않고 저세상으로 가기 위해 당연히 거쳐야 하는 단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평상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가 보다.
어저께 아침에는 성당 교우의 가게를 방문하여 최근에 암으로 진단받은 그의 누님의 건강이 어떤지 물어보았더니 식욕부진으로 식사를 제대로 못 한다고 했다. 초기 환자의 경우 정신적인 충격으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안타까웠다. 주위에서 식사를 잘 하라고 열심히 권하겠지만, 식사를 제대로 못 하는 환자의 심정은 오죽하랴.
오후에는 얼마 전에 암 수술하고 항암 치료 중인 교우를 만났다. 조금 마르긴 했어도 원기를 잃지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이 반가웠다. 식욕이 떨어져서 음식을 많이 먹지는 못해도 이것저것 조금씩 열심히 먹으려 애쓰고,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는 운동하고, 산책, 독서 그리고 노래 부르기로 스트레스도 적절히 해소한다는 그가 미더웠다.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이웃 돕기에도 열심이던 사람이 뜻밖의 병으로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파 눈물이 질금질금 나오려고 해서 몰래 닦아내며 속으로 말했다. “그래, 그렇게 기죽지 말고 이겨내. 암이 뭐 별건가?” 만나기 전엔 별별 상상으로 마음이 무거웠지만 씩씩한 그의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와 같은 날에 수술받고 같은 병실에 입원했던 또 다른 교우의 근황을 물어보았는데 그가 한 얘기는 참 실망스러웠다. 자포자기 심정이었는지,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고 그랬는지 몰라도 그 친구는 의사가 절대로 마시지 말라고 한 술까지 마시며 투병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거 원 무슨 소린지? 목숨을 두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의료진은 소중한 생명을 구해보겠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텐데 정작 환자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지내면 안 되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의료진과 환자가 함께 노력해야 치유라는 좋은 결과가 나오는 법인데.
그런데 내 주위에는 왜 그리 아픈 사람이 많을까?
집에 돌아와서 성경에서 ‘히즈키야의 발병과 치유’라는 소제목이 붙은 이사야서 38장을 찾아서 읽었다. 특히, ‘병에 걸렸다가 그 병에서 회복된 유다 임금 히즈키야의 글이다.’로 시작되는 ‘히즈키야의 찬미가(이사 38,9~22)’를 몇 차례 정독했다. 내 주위의 아픈 분들 모두가 치유되어 히즈키야 처럼 다음 구절과 같은 환희의 찬가를 부르게 되면 좋으련만.
“보소서, 저의 쓰디쓴 쓰라림은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신께서는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제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구하시는 분. 우리 한평생 모든 날에 주님의 집에서 현악기 타며 노래 부르세.”
(2014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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