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나 홀로 산을 오르고 있었다

삼척감자 2024. 9. 26. 05:22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을 나 홀로 오르고 있었다. 새나 벌레 그리고 짐승도 보이지 않고 나무도 없이 억새나 갈대처럼 생긴 풀로만 온통 뒤덮인 산의 풍경은 삭막했다. 구름이 잔뜩 끼어 하늘은 흐리고, 강한 바람이 불다가 그치고, 그쳤다가 불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키 큰 풀들이 이리저리 어지러이 흔들렸다. 좀 떨어진 산꼭대기에 다 쓰러져가는 외딴 오두막집이 보였다. 최근에 이사 온 가족 세 명이 그 집에 살고 있다고 누군가가 소곤거리는데 말하는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몸이 오싹하도록 찬 바람을 맞으며 산길을 혼자 허위허위 걸으려니 스산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어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두 달 동안 깊은 잠에 빠졌었다. 남들은 그게 혼수상태였다고 하는데,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의식은 있었던 것 같고 그동안에 꾼 꿈인가 환시인가를 몇 가지 기억하고 있으니 의식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겠다. 그중에서 어떤 것은 어쩌면 의식을 되찾은 직후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본 환시일지도 모른다.

 

병상에 누워서 그렇게 잠만 자며 지내던 두 달 동안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산길을 홀로 오르기도 했고, 야생화가 가득 핀 나지막한 야산을 거닐기도 했고, 작고 아름다운 성당에서 창밖을 내다보려고 발돋움하기도 했고, 폭설이 내리는 밤에 강당처럼 큰 실내에서 서류를 잔뜩 쌓아놓고 누군가와 일에 몰두했고, 창밖으로 멀리 바다가 보이는데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경계가 분명치 않아서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부터가 하늘인지 확인해 보려다가 그만 까무룩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가끔 흐려져 가는 의식을 모아서 차에 치인 다리의 상태가 어떤지 확인해 보려고 애쓰던 그런 여러 가지 기억이 도막도막 떠오른다. 

 

그런 기억 중에서도 혼자서 산길을 허위허위 올라가던 광경이 생각날 때면 오싹하고 불안해진다. 그래서인지 몇 년이 흘러 다른 기억은 희미해져 가는데 그 기억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 광경이 떠오를 때마다 준비 없이 살다가 혼자서 저세상으로 가는 길이 아마 그렇게 불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저세상으로 가다가 다시 돌아온 후에는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 소식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과 싸우며 고통스럽게 지내시던 분들이 편안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전해 들으면, 그분들이 가시는 길에는 주님이 함께하셨으려니 생각된다.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가사의 구절이 좋아서 복음성가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가끔 듣는데, 들을 때마다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 주님이 동행하신다면 참 행복하고 편안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적 빈곤에 빠지면 하느님에게서 눈을 돌려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만심에 가득 차서 그분이 내미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때, 우리는 몰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 전에 하셨다는 말씀이다.

 

교통사고 기념일(?)인 오늘 아침에 이 글이 생각나서 찾아 읽으며, 주님이 얘야, 내 손잡아라. 그리고 나에게 맡겨라.” 하시면 바로 알아듣고 내 손을 내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러구러 작년 오늘에서 또 한 해가 지났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또 한 해, 그리고 또 한 해그렇게 살겠지. 그렇게 세월만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잘 살다가 잘 죽어야 할 텐데.

 

(2014 6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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