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81

소녀야 일어나라

참 오래전 일이었다. 뉴욕 한국 라디오 방송을 듣다 보면 가끔 어느 할머니께서 전화로 가수 허영란이 부른 날개라는 노래를 신청하였다. 할머니는 그 노래를 신청할 때마다 식물인간 상태로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아들이 이 노래 가사처럼 벌떡 일어나 뛰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면 참 가슴이 아팠는데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잃고 재활원에 드나들며 걸음마를 다시 배우고 이 노래를 들으며 용기를 얻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날개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일어나라 아이야 / 다시 한번 걸어라 / 뛰어라 젊음이여 / 꿈을 안고 뛰어라 / 날아라 날아라 / 고뇌에 찬 인생이여 / 일어나 뛰어라 / 눕지 말고 날아라 / 어느 누가 청춘을 / 흘러가는 물이라 했나 /어느 누가 인생을 / 떠도는 구..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사신(死神)과 아가씨

교통사고를 당하고 두 달 동안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났을 무렵이었다. 의식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꿈이 생시 같고, 생시가 꿈같던 때였다. 어느 날 아침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꿈에서 막 깨어났는데 마침 신부님이 방문하였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였던지 꿈에서 뭘 보았는지 물어보기에 당시에 성대가 손상되어 말할 수 없던 나는 글 쓰는 판을 달래서 ‘연옥’, ‘토론’, ‘있음’이라고 썼다. 바로 잊을 뻔한 꿈이 아직도 생각나는 건 때맞춰서 방문한 신부님 덕분이다.  꿈에서 낯선 사람 둘이 연옥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나는 연옥이 있다는 사람이 토론에서 이기기를 바라며 지켜보고 있는데, 연옥이 없다는 사람이 논리적으로 밀리는 걸 보며 “그럼, 그렇지.” 하며..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다리 절단 수술 후 나는 병실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기운이 전혀 없다. 다리 쪽을 내려다보니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을 가린 침대 시트가 눈에 띈다. 왼쪽 다리가 있어야 할 곳이 푹 꺼져 있다. 난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왜 접니까? 오 하느님, 왜 하필이면 저냐고요? 신체 일부를 잃은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대개 이와 같을 것이다. 고통과 분노 등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다.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감정도 이와 비슷하겠지만, 투병 기간이 길어질수록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에서도 잊힌다는 소외감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까지 더해진다면 그 고통이 어떨지는 상상하기 어렵다. 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을 때도 그랬다. 입원 초기에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큰 위로가 되었고 나를 위해 많..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더라

중학교 도덕 시간에 배우기를 한국인은 예전부터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을 누리는 걸 가장 완전한 행복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 나온 것인데 딸이나 아들이 결혼할 때 복을 비는 마음으로 써 준 글귀라고 한다 忠孝傳家 (충효전가)--충성과 효도로써 가문을 이어감 壽福康寧 (수복강녕)--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함 富貴多男 (부귀다남)--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아들이 많음 이런 행복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지금까지 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내가 오래 살 수 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고, 가진 재산도 없어서 유언장 쓰기 쉽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도 없고,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 둘만 있어서 수부귀다남 중에서 아직은 어느 것 하나 가진 것이 없으니 전통적인 기..

교통사고 이후 2024.09.26

나는 하늘을 날았다

두 딸이 어린아이였을 적에 즐겨 본 만화 영화 중에 덤보 (Dumbo)가 있었다. 그 영화는 딸들뿐만 아니라 나도 워낙 좋아해서 수십 번을 함께 보았는데 귀가 유달리 커서 놀림을 받고 자라던 아기 코끼리 덤보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하늘을 날게 된다는 얘기가 재미있었다. 이 영화는 70년 전에 제작되었지만, 아직도 전 세계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날개가 없고 귀가 작은 나도 날아 본 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자르는 대수술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두 달 후에 깨어난 지 얼마 후였다. 당시에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강력한 진통제를 투여해서인지, 아니면 의식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서였는지 늘 정신이 몽롱해서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고,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가족이나 ..

교통사고 이후 2024.09.25

제삿날이 될 뻔했던 날

5년 전 오늘, 그러니까 2005년 6월 27일에 교통사고를 당하여 생과 사의 경계선을 오락가락하다가 하느님 나라로 가기에는 때가 일렀던지 이 세상에 다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것 같은데 이제 겨우 5년이 흘렀을 뿐이다.  매일 밤, 오늘 밤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초조하고, 불안하고, 마음이 바빴었는데 다시 살아나서 여러 해가 지나니 이제는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다. 오늘이 어쩌면 제삿날이 될 수도 있었는데 고맙게도 다시 태어난 날이 되었다. 생과 사가 내 뜻대로가 아니고 모두 우리 주님이 주관하심을 환갑이 지나 어렴풋이 깨달았으니 뒤늦게 철이 들어가는 걸까?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행복이..

교통사고 이후 2024.09.25

저를 낫게 해 주소서. 저를 살려 주소서

-히즈키야의 발병과 치유(이사야서 38장)를 읽고- 유다 왕국의 히즈키야 임금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는데, 이사야 예언자가 그에게 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너는 회복하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히즈키야가 이 말을 듣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말씀드렸다. ‘아, 주님, 제가 당신 앞에서 성실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걸어왔고, 당신 보시기에 좋은 일을 해 온 것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를 낫게 해 주소서. 저를 살려 주소서.’” 그러고 나서 히즈키야는 슬피 통곡하였다.  그러자 주님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내렸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병이 들었다가 그 병에서 회복된 임금 히즈키야는 다음과 같이 주님을 찬미했다. “보소서, 저의 쓰디쓴 쓰라..

교통사고 이후 2024.09.25

음식남녀를 보다가

대만 출신 이안 감독(‘와호장룡’의 감독)의 ‘음식남녀’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미국 버전인 ‘Tortilla Soup’을 먼저 보았다. 재활원 입원 중에 큰딸이 휴대용 DVD Player를 사다 주면서 DVD를 여러 장 갖다주었는데, 그중에 한 장이 바로 미국 버전의 ‘음식남녀’였다. ‘Tortilla Soup’은 남미 출신 가족의 이야기로서 유명 호텔 주방장 출신인 홀아버지와 세 딸의 이야기를, 음식을 매개체로 해서 가족의 사랑이 맺어지고, 확인되는 영화인데 나중에 이안 감독의 원본을 보면서 비교해 보아도 두 작품의 내용이 거의 같고 재미나 짜임새가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개 인적으로는 미국 버전이 더 재미있었다. 전체적인 줄거리에 관심을 두고 재미있게 보기는 퇴원 이후에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였지, ..

교통사고 이후 2024.09.25

병원에서 만난 외국인들

교통사고를 당해서 대학병원에서 석 달, 그리고 재활원에서 석 달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문병하러 오시는 분들 말고는 내내 외국인들과 함께 지냈다. 그 당시에는 성대가 망가져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과는 손짓, 표정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필담으로 의사 소통하였으므로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퇴원하고 여러 달 동안 통원 치료와 재활 훈련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요즈음 한가해지니까 병원에서 만난 이들이 가끔 생각난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패트리샤 생각이 갑자기 나서 그녀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로 전화했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이제 워커를 짚고 걷는다고 했더니 연방 "Steve, God is great!"라고 감격스러워하더니 우리 딸들과 사위의 이름까지 기억해 내며 안부를 물어보는 데..

교통사고 이후 2024.09.25

백만 불짜리 미소

“Handbook for the Ministers of Care”라는 책에서 다음 글을 보았다. 원문은 영어인데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팔, 다리를 절단하거나, 유방 또는 다른 신체 장기의 일부 또는 전부를 제거하는 수술을 받은 사람은 외모가 흉해졌다는 생각도 들지만, 자신의 가치가 손상되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일을 겪은 사람은 몸이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고 해당 부위가 온전하게 대치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육체적인 고통 말고도 이러한 손상은 정신적인 충격을 수반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변화에 대처할 수 없어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슬픔에 빠지게 된다. 또 우울증에 빠져서 재활 훈련 등을 완강히 거부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러한 손상에 대하여 보이는 반응은 비탄, 우울증 그..

교통사고 이후 202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