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도덕 시간에 배우기를 한국인은 예전부터 ‘수부귀다남(壽富貴多男)’을 누리는 걸 가장 완전한 행복으로 여겼다고 한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 나온 것인데 딸이나 아들이 결혼할 때 복을 비는 마음으로 써 준 글귀라고 한다
忠孝傳家 (충효전가)--충성과 효도로써 가문을 이어감
壽福康寧 (수복강녕)--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건강하고 평안함
富貴多男 (부귀다남)--재산이 많고 지위가 높으며 아들이 많음
이런 행복의 기준으로 보면 나는 지금까지 별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 내가 오래 살 수 있을지는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고, 가진 재산도 없어서 유언장 쓰기 쉽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지위도 없고, 아들은 하나도 없고 딸 둘만 있어서 수부귀다남 중에서 아직은 어느 것 하나 가진 것이 없으니 전통적인 기준으로 보면 별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아파트의 관리인 호세의 아내는 늘 휠체어에 앉아서 지낸다. 당뇨로 말미암은 합병증으로 하체의 한쪽을 골반에서 다리까지 절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 밖에 나올 때는 호세가 밀어주는 휠체어로 다닌다. 며칠 전 저녁에 아파트 복도에서 그들 부부를 만났는데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받았다. “혹시, 환상통으로 힘들지는 않아요?” “어쩌다 느끼지만 바로 지나가니까 견딜만해요.” “의족이 무겁지는 않아요?” “꽤 무거워요. 하지만 이렇게라도 걸을 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그거 얼마 들었어요?” “거의 3만 불 정도 들었는데 보험 혜택을 받아 20%만 냈어요. “보행 훈련은 얼마나 받았어요?” “여러 달 받았어요. 그것도 꽤 돈이 들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 그녀는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서 사회보장 의료혜택을 받을 수 없기에 6만 불이 넘는 의족을 전액 돈 주고 살 형편이 되지 않고 오랫동안 훈련을 받을 용기도 없고, 무거운 의족으로 걸을 자신도 없어서 늘 휠체어에 앉아서 지내지만, 이제는 익숙해져서 음식도 만들고 진공청소기도 조작하며 일상적인 가사를 돌볼 수 있다고 한다. 그녀가 가엾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바지를 걷어 올려서 의족을 보여주며 의족과 보행 훈련 과정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얘기하는 동안 내내 그들 부부가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 보장 혜택을 보려면 아직도 여러 해를 더 기다려야 한다니 아무래도 그녀가 걷는 걸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휠체어를 박차고 일어나 걸을 수만 있어도 삶이 풍요로워질 텐데. 그들이 지금 바라는 걸 뭘 까? 돈과 명예 같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고 일어나 걷는 소박한 소망일 텐데.
어느 날 내 블로그에 남긴 다음 글을 보고 나는 마음이 찡해졌다.
“안녕하세요, 우연히 이 블로그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울산에 사는 평범한 16살 학생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의 아버지도 지금 혼수상태에 계십니다. 몇 년 전에 혼수상태에 있으셨다가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5월 2일에 대학병원에 입원하셔서 지금 24일째가 되었습니다. 하루하루가 아버지 생각에 슬프고 힘들지만 2개월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일어나신 선생님이 저에게는 많은 위로가 되네요. 저도 아버지가 빨리 깨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고 깨어나시면 더욱 잘해 드리고 감사할 거라고 항상 느낍니다. 그럼, 앞으로도 자주 들러서 좋은 글 많이 보고 가겠습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착한 학생이 있다니... 며칠 후에 이 학생이 남긴 “정말 부럽네요. 저희 아버지도 어서 일어나셔서 선생님처럼 이렇게 건강히 지냈으면 좋겠네요!”라는 다른 댓글을 보고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했다. 이렇게 효성 지극한 아들을 둔 그분은 쓰러질 때까지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이 학생은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두 달 만에 회복된 나의 체험담을 보고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듯했다. 그가 바라는 건 뭘까? 아버지가 다시 깨어나서 자식에게 말 한마디라도 건네 주는 것일 거다. 최근에 이 두 사람과 말과 글로써 대화를 나눈 후에 나는 수부귀다남인가 뭔가는 잊기로 했다. 다리 하나로 걷는 나를 이토록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어디 한둘이겠는가?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라는 걸 생각하면 설사 걷지 못 한다고 하더라도 살아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건지 다시 깨닫게 된다.
(2012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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