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나는 하늘을 날았다

삼척감자 2024. 9. 25. 07:21

두 딸이 어린아이였을 적에 즐겨 본 만화 영화 중에 덤보 (Dumbo)가 있었다. 그 영화는 딸들뿐만 아니라 나도 워낙 좋아해서 수십 번을 함께 보았는데 귀가 유달리 커서 놀림을 받고 자라던 아기 코끼리 덤보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하늘을 날게 된다는 얘기가 재미있었다. 이 영화는 70년 전에 제작되었지만, 아직도 전 세계 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날개가 없고 귀가 작은 나도 날아 본 적이 있다.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를 자르는 대수술을 받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두 달 후에 깨어난 지 얼마 후였다. 당시에는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강력한 진통제를 투여해서인지, 아니면 의식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아서였는지 늘 정신이 몽롱해서 몸이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고,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았다. 가족이나 문병객이 하지 않은 말도 들은 것으로 착각했고, 들은 말도 왜곡해서 이해하기가 일쑤였지만 성대에 이상이 생겨서 말할 수 없을 때라서 일일이 물어볼 수도 없어서 혼자서 제멋대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답답해하는 나에게 큰딸이 언젠가아빠, 말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돼.”라고 했다고 착각했다.

 

어느 날 한밤중에 병실을 날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앞에서 뒤로, 위에서 아래로. 또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날며 기쁨에 넘쳐서 소리 질렀다. “큰딸, 봐라. 아빠가 난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 있잖아.” 입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걸 느낀 순간 가슴이 벅찼다. 한참 날다가 피곤해서 침대로 내려와서 잠에 떨어졌는데 얼마 후 동이 트고 간호사가 들어 왔기에 “Good morning!”이라고 말하려다가 첫 번째로 딸에게 말하기로 한 약속이 생각나서 입을 다물었지만 뭔가 좀 이상했다. 간호사가 병실을 나간 후에 내가 정말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는지 확인하려고 혼자서 큰 딸을 크게 불러보았다. “큰딸!” 그런데 목소리는 전혀 나오지 않고 망가진 성대를 통해 쇄쇄하는 바람 소리만 힘없이 들려서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환각과 현실의 차이는 그렇게 컸다.

 

그 후에도 의식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몇 번 더 날아 보았다. 한 번은 우리 성당 가족 모두가 참가하는 등산 행사에서 나는 하늘을 훨훨 날면서 교우들이 힘들게 산길을 걷는 걸 내려다보았다. 영화 덤보에서 하늘을 날아 보려고 애쓰는 새끼 코끼리를 보고 까마귀들이코끼리가 나는 걸 본다면 세상에서 볼 건 다 보는 거야(I think I will have seen everything when I see an elephant fly.)”라고 놀렸다. 마찬가지로 내가하늘을 날았다.”고 자랑하면 다들스테파노가 하늘을 난 걸 믿는다면 세상에 못 믿을 게 없겠지.”라고 놀리겠지. 그런데 나는 정말 날았다. 공간을 자유롭게 날아다닌 기억이 지금도 생생한데. 다들 왜 내 말을 믿지 않는 거야.

 

병원 생활 6개월 후, 퇴원할 무렵에 의사가 통증이 심하면 먹으라며 빨간 알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 약을 먹으면 통증을 잊을 수 있었지만, 마음이 온통 들떴다. 하늘도 날 수 있을 것 같았고 세상 근심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하기만 했다. 심상치 않은 생각이 들어 주치의에게 물어보았더니 그 약이 벌써 진통 효과를 넘어서 마약으로 작용하는 것 같으니 당장 끊으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 주사한 진통제의 약효가 너무 강해서 환각 상태에서 하늘을 날았다고 착각한 게 아닐까 모르겠다.

 

날씨가 궂거나 몹시 피곤한 날이면 가끔 빨갛고 매끈매끈한 그 약이 생각난다. 한 알만 먹으면 몸이 개운해질 텐데. 여러 해가 지나도록 마약의 유혹은 끈질기다.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고 쌍지팡이를 짚고 산지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아직도 장애인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잦다.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게 꿈이고, 환각이라고 생각 한 것이 사실은 현실이었는지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면 이 세상에서의 삶이 꿈이었다고 여겨질 텐데.

 

(2013 1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