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출신 이안 감독(‘와호장룡’의 감독)의 ‘음식남녀’를 보기 전에 이 영화의 미국 버전인 ‘Tortilla Soup’을 먼저 보았다. 재활원 입원 중에 큰딸이 휴대용 DVD Player를 사다 주면서 DVD를 여러 장 갖다주었는데, 그중에 한 장이 바로 미국 버전의 ‘음식남녀’였다. ‘Tortilla Soup’은 남미 출신 가족의 이야기로서 유명 호텔 주방장 출신인 홀아버지와 세 딸의 이야기를, 음식을 매개체로 해서 가족의 사랑이 맺어지고, 확인되는 영화인데 나중에 이안 감독의 원본을 보면서 비교해 보아도 두 작품의 내용이 거의 같고 재미나 짜임새가 별로 차이가 없었는데 개 인적으로는 미국 버전이 더 재미있었다. 전체적인 줄거리에 관심을 두고 재미있게 보기는 퇴원 이후에 영화를 다시 보고 나서였지, 재활원에서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어느 장면에서 가슴이 답답해서 계속 볼 수가 없었다. 가족 간의 사랑에 가슴이 찡했다던가 당시 음식을 못 먹던 상황에서 영화에 나오는 푸짐한 음식을 보고는 속이 뒤집혔다든가 하는 얘기가 아니고 조금은 엉뚱한 얘기다.
고등학교 화학 선생인 큰딸은 실연당한 뒤 남자를 거부하는 노처녀인데 같은 학교에 새로 부임한 야구부 코치에게 끌리게 되고, 코치는 큰딸이 적극적으로 나오자 어리둥절해하면서도 호감을 느끼게 된다. (대만에서 만든 원본은 내용이 조금 다르다) 코치가 큰딸에게 볼 일이 있어서 운동장에서 교실로 올라가는 장면에서 학교 본관 앞 폭이 넓은 수십 계단을 한꺼번에 여러 계단을 건너뛰며 성큼성큼 순식간에 올라가는 걸 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그 당시에 나는 사고로 다리 하나를 잃고 재활원에서 하루 두 차례 재활 훈련을 받는 시간 외에는 종일 침대에 누워서 지내고 있었는데 의족을 끼고 지팡이를 짚는다고 해도 두 다리로 걸을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을 당시에 이 장면을 보니 서러웠다. ‘아, 나는 다시는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겠구나’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퇴원 후에 맞닥뜨릴 절망적인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불편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을 테고, 앉아서 지낼 일상이 매우 무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여러 해가 지나서 일상에 적응되고 보니 조금 불편한 점은 많이 있어도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별로 없다. 계단 오르기는 조금 불편하기는 해도 천천히 오르면 되고, 골프는 못 쳐도 전혀 서운하지는 않지만, 주로 골프를 화제로 삼는 모임은 되도록 피하면 된다. 운전을 못 해서 마음대로 나다닐 수는 없지만 아내의 눈치만 잘 살피면 그것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고 싶지만, 누가 도와줄 수도 없어서 할 수 없는 일은 깨끗이 포기하면 되니 그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책 읽기를 좋아하지만, 그동안 시간이 없어서 못 읽은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고, 영화도 보고, 클래식 음악 감상에 취미를 붙여서 제법 많이 모아놓은 음악을 골라서 듣기에도 바쁘고, 온갖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상과 소통하고, 소식이 뜸했던 옛 친구들도 찾아서 이메일로 소식을 주고받고, 가끔은 못 쓰는 글이나마 끼적거리고, 요즈음은 성경도 열심히 읽고. 이러다 보면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이렇게 바쁘게 살게 될 줄도 모르고 좋은 영화를 보면서 엉뚱한 장면에서 가슴이 미어졌었다. 이 글을 쓰면서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루카 12, 34)라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2008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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