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를 당해서 대학병원에서 석 달, 그리고 재활원에서 석 달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문병하러 오시는 분들 말고는 내내 외국인들과 함께 지냈다. 그 당시에는 성대가 망가져서 말을 할 수 없었기에 그들과는 손짓, 표정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필담으로 의사 소통하였으므로 나는 주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다. 퇴원하고 여러 달 동안 통원 치료와 재활 훈련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다가 요즈음 한가해지니까 병원에서 만난 이들이 가끔 생각난다. 오랫동안 소식을 듣지 못한 패트리샤 생각이 갑자기 나서 그녀가 살고 있는 노스캐롤라이나로 전화했더니 무척 반가워한다. 이제 워커를 짚고 걷는다고 했더니 연방 "Steve, God is great!"라고 감격스러워하더니 우리 딸들과 사위의 이름까지 기억해 내며 안부를 물어보는 데 새삼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큼직한 체구의 흑인 목사인데, 체구에 걸맞게 마음씨도 넉넉했다. 목소리를 되찾고 처음 하는 통화이니 사실상 생전 처음 대화를 한 셈이다.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사고를 당한 직후였다. 동생이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서 나하고 같은 병실에 입원했었는데 동생을 문병하기 위하여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방문했을 때 알게 되어 동생이 퇴원하고, 내가 재활원으로 옮기고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열정적인 기도를 오래 바쳐 주곤 했다. 기도할 때마다 주님 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주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우쳐 주려고 애쓰곤 했다. 그녀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 감사하다. 이제 비록 의족을 끼고 워커를 짚었지만,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니 "주님은 위대하다."라고 한 패트리샤의 말이 자주 생각난다.
대학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매 주일 방문하시던 미국인 신부님이 계셨다. 오상 비오 신부님을 연상케 하는 외모를 가지셨는데 방문하실 때마다 강복을 주시면서 "많이 좋아졌네."라든가, "와, 백만 불짜리 미소를 가졌네!"라고 말씀하셨는데 뵐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백만 불짜리' 미소라는 값을 하려고 다른 문병객들을 대할 때마다 많이 웃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신부님을 통하여 평화를 느끼게 하시고 희망을 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린다. 갑자기 병원을 옮기는 바람에 인사도 못 드리고 헤어진 것이 마음에 걸린다.
재활원으로 옮기고 나서 얼마쯤 지난 어느 주일, 미국 신부님이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한다는 말을 듣고 외국인 교우들과 함께 회합실에 모여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호흡이 불편해져서 미사 참례를 포기하고 병실로 내려와 혼자 누워 있었다. 한참 지나서 직원의 안내로 한 80세 정도 되어 보이는 노신부님 한 분이 들어 오시는데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에 겨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고백성사를 권유하시고, 봉성체를 해 주시는데 짧은 강론도 해주시고는, 하느님이 메시지를 주셨다면서 "지금, 이 순간 나에게는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다."라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한참 눈물을 흘렸다. 오랜 입원 생활로 지쳐 가던 무렵에 신부님을 통해서 들은 주님의 말씀은 나에게 다시 삶의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재활원으로 옮기고 얼마 후에 바로 옆 병상으로 스무 살 된 에릭이라는 청년이 오게 되었다. 키가 크고 아직도 앳된 소년티가 남아 있는 대학생이었는데 한 달 전에 숲속에서 스쿠터를 타다가 나무에 세게 부딪혀서 뇌를 다치는 바람에 몸을 제대로 가누질 못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에릭의 부모가 계속 그를 부축하여 함께 걸으며, 음식을 떠먹이고 계속 말을 걸며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그의 두 형도 자주 방문하여 에릭의 몸도 닦아주고 면도도 해 주고 하는 게 참 보기가 좋았다. 그런데 2주쯤 지난 어느 날 아침에 문병객 여러 명이 왔기에 보니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흐느껴 울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 전날 밤 에릭의 둘째 형이 혼자서 운전하다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사고가 나면서 사망했다고 한다. 무척 가슴이 아팠다. 사고 후 처음으로 주님이 원망스러운 날이었다. 두어 달 후에 내가 퇴원할 때까지 에릭의 상태는 별 진전이 없었고 그의 부모의 눈은 늘 퉁퉁 부어 있었다. 퇴원하고 몇 달 후에 방문해 보았더니 그동안 상태가 호전되지 않아서 집 부근에 있는 다른 재활원으로 옮겼다고 했다. 지금쯤은 건강을 되찾아 가족 모두가 웃음을 되찾았기를 바랄 뿐이다.
리처드는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흑인 청년이었다. 몸도 닦아 주고, 그 당시에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였는데 리처드가 내 배설물을 자주 처리해 주었다. 더러운 것을 치우면서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아서 참 고마웠다. 아내는 그를 철수라고 불렀고 그 녀석은 출근하면 내 병실에 들러서 "형님, 안녕하세요."라고 아내한테 배운 한국말로 인사를 하곤 했다. 늘 사람이 그립고, 입원 생활이 답답하던 때에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해준 녀석이다.
재활원으로 옮기고 나서도 얼마 동안은 너무 기운이 없어서 침대에서 꼼짝을 하기 싫었다. 매일 아침 아론이라는 물리 치료사가 병실로 찾아와서 침대에서 휠체어로 그리고 체육관으로 옮기는 게 너무 싫었다. 내가 처음으로 평행봉을 짚고 한 다리로 일어서자, 그는 매우 기뻐하며 환호성을 올렸다. 처음에 10여 초 밖에 서질 못했는데 점점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여서 나도 점차 재활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몇 달 후에 나를 전담하게 된 에리카라는 백인 처녀는 얼굴과 몸매가 예쁘고 마음씨도 고와서 재활 훈련을 받는 게 즐거웠다. 잘 펴지지도 굽혀지지도 않는 다리의 상태를 개선해 보려고 진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누르고 당기며 무진 애를 썼다.
그 이후에 만나게 된 제니퍼는 나를 두 다리로 걷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의족을 끼고 워커를 짚으며 걷고, 1~2주 후에는 포어 암 클러치(팔꿈치까지 올라오는 의족)를 짚고 평지는 물론 계단도 어려움 없이 걸을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들 모두가 내가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야단도 치고 격려도 해주고, 진전이 있으면 자기 일처럼 기뻐해 준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이렇게 좋은 만남이 있게 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많은 이들을 통해서 주님을 뵈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사랑과 평화를 느끼게 해 주시고 또 이들을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셨다. (2008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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