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나는 성격이 유별난 아이였다. 자식들이 말썽을 부리면 어머니는 야단을 치시고는 잘못 했다고 비라고 했는데 형제 중에서 나 혼자만 끝까지 “내가 뭘 잘못했어요?” 하고 바락바락 대들고 따지는 통에 매를 벌곤 했다. 성질을 건드리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참 다루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어릴 적에 하도 많이 야단맞고 매 맞고 자란 탓인지 나이 들어서도 어머니와의 관계가 서먹서먹한 편이다. 지금도 어쩌다 친척을 만나면 어릴 적의 내 못된 성질을 두고 화제로 삼는 통에 민망스럽기 짝이 없다. 이제 와서 누굴 탓하겠는가? 모두 내 성질머리가 못된 탓이었지.
늘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으며 살다 보니 어디에 부딪혀서 코피가 나면 이불 솜을 꺼내서 코를 틀어막거나, 어디든 상처를 입어서 피가 나면 상처난 곳에 고운 흙을 뿌리거나, 종이나 헝겊을 찢어 붙이거나 해서 혼자서 처리하곤 했다. 어머니에게 말해 보았자 야단만 맞을 테니까.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여서 어디든 부서진 집이 많아 수리하려고 어수선하게 늘어놓은 널빤지들이 많았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서 바닥에 널린 널빤지 위에서 장난을 치는데 갑자기 발바닥이 뜨끔했다. 얼른 고무신을 벗고 살펴보니 녹슨 대못이 발바닥을 깊숙이 찌른 것이었다. 언젠가 친척 아저씨가 못에 찔렸을 때 하던 것처럼 망치로 발바닥을 사정없이 두드려서 피를 뽑아내고, 성냥개비에서 유황을 긁어모아 상처 주위에 고루 뿌리고는 성냥 불을 붙였다. 어른들이 하던 대로 확실하게 상처를 지져서 소독하려던 것이었다. 아픔과 뜨거움을 참고 있는데 아버지가 마침 집에 들렀다가 보시며 한 마디 내뱉었다. ‘독한 놈’이라고.
결혼하고, 딸 둘을 낳아 기르며, 늘 여자들하고만 함께 지내다 보니 내 유별난 성격도 많이 누그러졌고, 딸들 앞에서 좋은 아빠 노릇을 하려고 애쓰다 보니 못된 성질도 많이 죽어서 이만하면 나도 제법 착한 편이라고 홀로 흐뭇해하면서 살아왔다. (이게 다 결혼 잘한 덕분이 아니던가? ^^)
그러나 큰 사고를 당해보니 내 독한 기질은 여전함을 확인했고 사고 후유증을 극복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 ‘독한 놈 만세’라도 부르고 싶다.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에도 정신을 놓지 않고 전화로 집에 알리고, 시간이 꽤 흘러서 구급차에 실릴 때까지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고 다들 놀라워했다. 다리 하나를 잃었는데도 병원에서 미소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정신을 놓지 않고 삶 쪽으로 돌아온 ‘독한 놈’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큰 사고를 당하거나 큰 수술을 받은 사람들 또는 중병에 걸렸던 사람들이 겪는다는 정신적인 후유증에서 빨리 회복된 데는 독한 기질 덕분만은 아니고 사실은 까마득한 옛날에 엄청난 고난을 겪었다는 신앙의 대선배 욥에게서 깨달은 바가 크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경을 읽으며 왜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욥이 엄청난 고난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히 욥기에 해답이 있으려니 생각하고 열 번 이상 읽어보고 해설서도 몇 권 읽어 보았다. 그러고도 하느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라는 욥의 말에서 큰 감명을 받고 많은 묵상을 한 끝에 욥기의 바로 이 대목이 내가 찾던 해답이라고 느꼈다. 그랬기에 사고 후에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도 욥이 고난을 이겨내던 일을 되새기며 어릴 적에 어머니에게 한 것처럼 “내가 뭘 잘못했어요?” 하고 하느님에게 대들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나에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가르침을 주신 욥에게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감사드리고자 한다.
사고 나기 바로 전날에 분도 수도원에서 레지오마리애 야외 행사가 있었는데 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날 수도원의 무인 서적 판매소에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책의 제목이 하필이면 “욥이 말하다.”였다. 주님은 나에게 곧 닥쳐올 고난을 예비하라는 뜻으로 그 책을 사게 하셨을까? 주님의 뜻은 정말 헤아릴 길이 없다.
(2007년에 씀)
'교통사고 이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만 불짜리 미소 (0) | 2024.09.25 |
---|---|
다시 욥기를 읽으며 (0) | 2024.09.25 |
정신은 오락가락, 기억은 뒤죽박죽 (0) | 2024.09.25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0) | 2024.09.25 |
나만을 위한 봉성체 (0) | 2024.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