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삼척감자 2024. 9. 25. 07:14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해변의 묘지는 길고도 난해한 시라서 끝까지 정독한 기억은 없으나 마지막 연의 첫 구, ‘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좋아하는 구절이다. 불문학자 김현은 원문 ‘Le vent se lève! . . . il faut tenter de vivre!’ (영역으로는 ’The wind is rising! . . . We must try to live!’)바람이 인다! … 살려고 애써야 한다!’로 번역했지만, 개인적으로는바람이 분다! … 살아야겠다!’ 라는 번역이 더 좋다. 시인 남진우는 그의 시에서 이 구절을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 바람이 불지 않는다 / 그래도 살아야겠다.’로 고쳐서 번역했다.

 

여러 해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의식을 잃고 병원에 입원하여 석 달 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병원 입원 중에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겨우 목숨을 구한 다음 상태가 호전되자 퇴원 후 다시 재활원에 입원하였다. 병원 측에서 재활원으로 이송한 이유는 장애가 된 몸으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되도록 적게 받고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적응 훈련과 기초 체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물리 치료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재활원에서도 석 달 입원했었다. 재활원에서의 일과는 매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두 시간씩 재활 훈련과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을 하고, 그와 별도로 매일 한 시간씩 Speech Therapy (발성 교정을 위한 물리 치료)를 받는 것이었다. 병원에서 기도를 절개하고 산소 호흡기의 호스를 삽입하는 과정에서 성대가 손상되어 여섯 달 동안 말을 못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음식이라고는 물 한 방울조차 넘길 수 없었던 때였다.

 

턱밑에 전기 충격을 주어서 성대 부근의 근육에 자극을 주고 혀를 상하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전부인 Speech Therapy는 한 시간 정도 걸렸는데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거라서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물리 치료사는 30대 초반의 날씬한 아일랜드계 백인 여자였는데 그녀도 나처럼 무료했던지 간간이 필담으로 치료와 무관한 개인 신상에 관한 잡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녀는 내 질문에 늘 친절하게 대답하고 치료가 끝나면 내 휠체어를 직접 밀어서 내 병실로 데려다 주었다.

 

날짜가 좀 지나니 별로 할 얘기도 없어서 창밖으로 보이는 큰 나무(떡갈나무 비슷하게 생긴)를 바라보며 무료함을 달렸다. 물리 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연방 혓바닥을 움직이는 게 참 재미없었다.

 

입원 초기에 무성하던 나뭇잎은 겨울이 되니 색깔은 다소 퇴색하였어도 그리 많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어느 겨울 아침에 보니 수많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이 마치 수없이 많은 새가 제각각 힘차게 날갯짓하는 것처럼 보였다. 넋을 잃고 나무를 바라보며 강렬한 생명력을 느끼니 내 가슴 깊숙한 곳에서 힘이 솟구쳐 오르는 듯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를 떠올리며 매일 나뭇잎이 밤사이에 많이 떨어지지나 않았는지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수많은 나뭇잎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버티어 나에게 삶의 의욕을 더 해 주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던 그 당시에는 매일 아침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고.

 

(2007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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