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정신은 오락가락, 기억은 뒤죽박죽

삼척감자 2024. 9. 25. 07:15

몇 년 전 교통사고가 났을 때, 구급차에 실리며 의식을 잃은 지 두 달 후에 정신이 되돌아왔다. 그 이후 몇 주간은 기억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여 문병객을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 기간에 문병하러 오신 분들은 대부분 기억하지 못하고 나중에 아내가 매일 수첩에 적어 둔 명단을 보고서야 다녀간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래도 몇 사람은 기억나는데, 평소에 가까이 지내던 분들은 오히려 기억나지 않는다. 혼돈상태에서는 기억도 뒤죽박죽인가 보다. 기억나는 몇 분 이야기.

 

방안이 어둑어둑하고 문이 닫혀 있어서 답답하다. 머리는 무겁고 목이 마르고 입안이 타니 오렌지 주스나 벌컥벌컥 들이켰으면 좋겠는데. 여기가 어딜까?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 자동차에 치이고, 구급차에 실리고, 그리고는 생각이 나질 않는다. 문을 열고 어떤 사람이 천천히 들어온다. 작은 상자 하나를 들었는데 마실 것이면 좋으련만. 잘 살펴보니 요셉 씨네. 저 사람이 웬일로 나를 찾아왔지? 내 침대 앞에서 머뭇거리는 모습이 미안해하는 모습이다. 머리를 숙이고 나를 살펴보는 표정이 몹시 걱정스러워 보인다. 잠시 머무르는 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병실을 떠났지만, 그가 온몸으로 걱정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물 한 모금 마실 수도, 밥 한 숟갈 먹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서 그가 두고 간 포도 상자는 손도 대지 못했지만 참 고마웠다.

 

요한 형제는 멀리 다른 주로 이사 간 분인데 볼일이 있어서 뉴저지에 왔다가 내 사고 소식을 듣고 바쁜데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내 병실을 찾아 주었다. 할 말을 잊고 있다가 한참 만에빨리 일어나 골프 쳐야지요.”라고 한 말에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중환자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다리 하나를 잃은 사람이 골프라? 그분의 말이 생각나서 퇴원 후 몇 달 지나서 장애인을 위한 골프 클리닉에도 가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사고 전에도 골프를 별로 즐기지는 않았지만, 장애인의 불편하고 느린 동작이 같이 골프치는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 있고 누군가의 시중을 받으면서까지 골프를 즐길 생각이 없어서였다.

 

의식을 되찾고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자매님 두 분이 방문했다. 누군가가 방문하면 말은 하지 못해도 눈이라도 맞추려면 기력을 긁어모아서 정신을 집중해야 하므로 피곤했다. 빨리 가셨으면 했는데 병실에 오래 머물렀다. 빨리 눈을 감고 잠 좀 자면 좋겠는데. 이분들이 병실에서 성령세미나를 하시는 건지 기도가 끝없이 이어졌다. 나도 같이 기도했다. “이분들이 빨리 가게 해 주소서.”라고. 요즈음 성당에서 이분들을 보면 괜히 미안해진다.

 

그리고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분들도, 눈물을 뚝뚝 흘리던 자매님들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3~4주쯤 지나서야 내 나이도 기억나고, 집 전화번호도 기억해 내었다. 물론 그 이후에 다녀가신 분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다. 입원 중에 다녀가신 분은 물론이고 나를 위해 많은 기도 바쳐주신 분들 모두에게 늘 감사드리고 있다. 이 모든 분을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할 텐데.

 

(2007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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