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나만을 위한 봉성체

삼척감자 2024. 9. 25. 07:13

교통사고로 병원에 장기간 입원하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오후에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신부님 한 분이 병실로 들어오시기에 깜짝 놀랐다. 키가 크고 허리가 약간 구부정하며 나이는 80세쯤 되어 보이는 미국인 신부님이었다. 신부님께서 왜 갑자기 오셨는가 의아했는데 간호사의 설명으로 전후 사정이 이해되었다.

 

한 달에 한 번 병원에 미국인 신부님이 오셔서 입원 중인 환자들을 위해 미사를 바치기로 한 날이 그날이었다. 몇 달만에 미사 참례를 하기 위해 간호사가 밀어주는 휠체어를 타고 미사드리기로 되어 있는 방에 가서 미국인 신자들 몇 명과 함께 신부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30분 이상을 기다렸는데, 신부님께서 고속도로가 막혀서 더 늦어질 것이라고 연락 해오셨다. 폐렴에서 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산소 호흡기가 옆에 없으면 불안하기도 하고 심신이 매우 피곤하기도 해서 병실로 되돌아와 침대에 누운 지 한참 지났을 때였다.

 

뒤늦게 도착한 신부님이 미사를 마치시고는, 환자 한 사람이 미사 참례를 못 했다는 얘기를 듣고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서 내 병실로 봉성체를 해주러 오신 것이었다. 신부님께서는 먼저 고백성사를 하겠느냐고 물어보셨다. 성대를 다쳐서 말하지 못할 때라서, 얼른 옆에 둔 공책과 연필을 가져다가, 말을 못 해서 고백성사를 할 수 없다고 적어 드렸더니 바로 봉성체를 시작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침대에 누워 있는 생면부지의 이방인 신자인 나를 위해서 정성껏 봉성체를 해주셨다.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노 사제의 봉성체 의식을 지켜보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봉성체 예식에 따라서 성경을 봉독하시고 짧은 강론도 해 주시는 도중에, 지금 그 순간에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 메시지를 전해 주셨는데, ‘지금, 이 순간 네가 나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해서 오랫동안 눈물을 흘렸다.

 

영성체를 하겠느냐고 물어보시기에 음식을 삼킬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공책에 써드렸다. 그랬더니 아주 작은 성체 조각을 물에 적셔서 모실 수는 없겠느냐고 물으시기에 그것도 위험하다고 했더니 매우 안타까워하셨다. 영세 후 지금까지 수없이 많이 미사에 참례하였고 퇴원 후에도 매 주일 영성체를 하고 있지만, 성체를 모실 수는 없었는데도, 병석에 누워서 한 그때의 봉성체야말로 가장 은혜로웠다는 생각이 든다.

 

(2007년에 씀)

 

 

 

 

 

 

두 번째로 행복한 때

 

 

 

 

교통사고를 당하고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생사가 오락가락하다가, 더는 생명에 지장은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3개월 만에 재활원으로 이송되었다. 재활원으로 옮긴 후 며칠 동안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되지 않아서인지 통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밤마다 사고 당시의 광경이 눈에 떠오르고, 잠이 들었나 싶으면 이내 악몽에 시달렸다. 그러자 재활원에서는 나에게 수면제를 투여해 보고 그래도 별 효과가 없자 내 병실로 정신과 의사를 보내서 상담하게 하였다. 그 당시에는 성대를 다쳐서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었는데 노련한 의사는 내 입술 모양만 보고도 내 말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의사의 주 관심사는 환자가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지 알아보는 데에 있는 것 같았다.

 

이리저리 질문 방식을 바꿔가며 여러 가지 비슷한 질문을 하더니 나에게 삶의 의욕을 불어넣어 주려고 열심히 애를 썼다. “당신은 희망이 있다. 당신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알고 있느냐. 명문 대학을 나와서 성공적인 삶을 사는 당신의 딸들, 아름다운 당신의 아내, 그들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라.” 등을 열심히 이야기하면서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건져 올려야 한다고 말하던 그녀는 눈을 감으라고 하고,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를 눈앞에 떠올려 보세요,”라고 거의 얼굴을 맞대다시피 하고 나직나직하게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반 최면상태에 빠져 들었던 것 같다.

 

언제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는지 생각하던 어느 순간 내 눈앞에 떠오른 것은 대여섯 살 무렵의 어느 날 광경이었다. 강원도 동해안의 고향 바다가 떠올랐는데, 파도는 밀려들어 오고 있고 나와 서너 살 된 내 남동생이 발가벗고 깔깔거리며 뛰어놀고 있었다. 정말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십 년도 지난 일인데. 정말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던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의사의 말이 들렸다. “무엇이 떠올랐나요. 당신의 결혼식? 당신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지요? 큰딸의 결혼식? 큰딸이 행복해하는 모습이 생각나나요? 아니면…” 하고 열심히 물어보는데 나는 말없이 의사를 바라보기만 했다. 나는 내 인생의 제일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글쎄 나의 결혼식 때였던가, 큰딸의 결혼식 때였던가, 아니면 두 딸 모두가 명문대학에 다니면서 나를 자랑스럽게 하던 그때였던가, 아니면? 모두 행복한 때였다. 하나만 꼽기가 정말 어렵다.

 

그렇지만 두 번째로 행복한 때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바로 지금이다. 다리 하나를 잃고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간절히 바랐던 것이 여러 가지 있었다. 다리를 되찾는 것? 아니다. 이룰 수 없는 거라서 빨리 포기했다. 오랫동안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서 헐떡거리는 동안에는 숨 한번 시원스레 쉬어 보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음식을 입으로 먹지 못해서 목마름과 배고픔으로 고생하면서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반년 동안 말할 수가 없어서 필담으로 의사를 소통하면서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는 건 우선순위에서 뒤쪽에 있었다.

 

지금 그때의 소망이 모두 이루어졌다. 숨 쉬는데 문제가 없고,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있고, 말도 할 수 있고, 게다가 다리는 하나이지만 일어나 걸을 수 있으니 당연히 행복하다. 주님은 인간이 쉽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너무 많은 걸 바라며,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기 때문에 행복한 줄 모르며 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먹고 마시고, 두 다리로 걷고 뛰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말이다.

 

얼마 전에 읽은 법정 스님의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정말 공감이 간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밖에서 오는 행복도 있겠지만 안에서 향기처럼, 꽃향기처럼 피어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것은 많고 큰 데서 오는 것도 아니고 지극히 사소하고 아주 작은 데서 찾아온다. 조그마한 것에서 잔잔한 기쁨이나 고마움 같은 것을 누릴 때 그것이 행복이다.”

 

(2007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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