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2월 27일 이른 아침에 또 수술대에 올랐다.
LA에서 일부러 온 작은딸, 필라델피아에서 온 큰딸 내외, 그리고 아내 등, 온 식구가 새벽같이 내가 입원해 있던 재활원으로 와서 나를 이송하는 구급차를 따라 대학병원으로 와서 수술 수속을 도와주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대학병원에 입원한 어느 날 밤, 잠자는 동안에 저녁으로 먹은 음식이 역류하여 토하면서 일부가 기도로 들어가는 바람에 급성 폐렴에 걸려 스스로 숨을 쉴 수 없게 된 사건이 있었다. 의료진이 급히 목 한가운데를 뚫고 산소 호흡기를 연결하는 와중에 기도에 삽입된 산소 호흡기의 호스가 성대를 손상시켜서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게 되었고, 삼키는 근육마저 손상을 입어서 먹고 마시지 못하게 된지 6개월이 지난 날이었다.
가족들과 수술실 앞에서 손을 흔들며 헤어지고 수술대에 오르니 머리 위에 있는 조명등은 어찌 그리 싸늘한지. 내가 무사히 수술을 받고 다시 저 수술실 밖으로 나가게 될지 불안한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목소리를 되찾고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으려니 하는 기대가 이내 불안감을 덮었다.
의료진이 수술 준비를 하는 동안에 마음속으로 기도하고 예수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수술 날짜를 잡기 위해 담당 의사를 만났을 때 그는 좋은 결과를 장담할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나, 나는 별로 걱정이 되지 않았다. 수술만 끝나면 손상된 성대와 삼키는 근육이 원상 복구되어 바로 먹고, 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위장에 삽입된 호스를 통해 유동식으로 연명하였기에 영양 공급이 충분하지 못하여 피골이 상접해 있었고, 늘 배고픔과 목마름에 시달렸다. 그리고 목소리가 전혀 나오지 않아서 사람들과 필담으로 의사소통하기에도 지쳐 있었다.
부부간에는 눈빛만 보아도 통한다던데, 그건 목소리를 잃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얘기이다. 말로써 의사소통이 되지 어찌 눈빛으로 된단 말인가? 그리고 필담으로 의사 표시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소통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을 생각이라도 해 보았는지? 목소리와 필담을 비유하면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라고나 할까.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므로 국부마취만 하고 한 시간 정도면 수술이 끝날 것이라고 했는데 시간은 왜 그리 길게만 느껴지던지. 환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술 담당 의사들은 간간이 농담도 해가며 여유 있게 수술하였다. 의식이 있는 상태였으나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가끔 산소 호흡기의 호스도 만지면서 애써 침착하려고 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니 두 시간 남짓 지났을 때, 수술이 끝났다. 집도를 책임진 의사가 수술 결과가 좋은지 확인해 보아야 하니 무슨 말이든 한마디 해 보라고 했다. 그때 불쑥 튀어나온 말이, “I Love You.”였다. 긴장해 있던 의사, 간호사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렸다. 그리고는, 다들 번갈아 가며, “Congratulations”를 연발했다.
나중에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실소하곤 한다. 하고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I Love You.”였던가. 아무튼, 그것이 기폭제가 되었던 듯싶다. 회복실에서 얼마간 기다리다가 가족들을 만나자마자, “여보 사랑해.”, “(큰딸), 사랑해.”, “(작은딸), 사랑해.”, “(한국어가 서툰 사위), I Love You.”를 잇달아 말하였다. 그러고는 며칠 동안은 가족들을 볼 때마다 “사랑해.”, “I Love You.”만 연발하였다. 가슴 속에는 하고 싶은 다른 말들이 가득 차 있었는데도 다른 말은 나오질 않았다. 그 며칠 동안에 평생 말할 “사랑해.”를 대부분 말해 버린 것 같다. 아마도 목소리를 잃은 6개월 동안에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사랑해” 였나보다.
(2007년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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