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는 휴전되고 2년 후인 1955년이니 전쟁의 참화가 채 사라지지도 않았을 때였으므로 주위에는 전쟁 중에 가족을 잃은 가정이 수두룩했고 집에서 멀리 보이는 산 위의 공동묘지에는 몇 년 사이에 새로 생긴 무덤이 숱하게 있었다. 묘지 위로 도깨비불이 떠도는 날 밤이면 아이들은 무서움에 떨었다. 주검을 자주 보아서인지 어른들이 해주는 옛날 얘기에는 도깨비나 귀신이 많이 등장했고 귀신을 직접 보았다고 그럴싸하게 허풍을 떠는 아이들도 많았다.
친구들이 듣고 보았다는 귀신 얘기는 대개 이런 것들이다. 어떤 여학생이 학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있는데 변기 아래에서 손이 불쑥 올라오더니,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하고 묻는 말에 기절했다더라. 밤늦게 어두운 골목에서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을 보았는데 칼이 꽂힌 등에서 피가 철철 흐르더라. 그걸 보고 놀라서 비명을 질렀더니 여자가 돌아보는데 얼굴이 없는 달걀귀신이더라. 장가 못 가고 죽은 이웃 총각이 대추나무 앞에 몽달귀신으로 나타난 걸 직접 보았다. 공동묘지를 지나는데 몇 년 전에 죽은 아무개 삼촌이 처참한 모습으로 나타나 아는 체하더라. 대강 이런 내용이었는데 나는 이런 말을 사실로 믿고 밤길을 혼자 걸을 때면 귀신 생각에 무서움에 떨곤 했다.
나이 열한 살, 어린 나이에 불면증으로 오랫동안 고생한 적이 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그 당시의 증상이 바로 정서 불안이었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생긴 문제로 그런 증상이 나타났던 것 같다. 밤마다 잠을 이루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정신은 더욱 또렷해지니 밤새 잠 못 이루고 뜬눈으로 새울 때가 잦아서 괴롭기 짝이 없었다. 잠버릇이 험해서 옆에서 이를 갈거나 다리를 내 배 위에 올려놓고 태평스럽게 잠든 동생이 괜히 미워서 밀치거나 때려서 깨워서 울리기도 하고 일없이 마루에 나가 서성거리다 어머니에게 혼난 적도 많았다. 불면증이 심해지니 한밤중에 헛것이 보여서 놀라기도 했지만, 친구들이 직접 보았다는 온갖 귀신이 나를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공상으로 공포에 떨었다. 밤새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빨리 시간이 흘러 새벽이 와서 귀신들이 사라지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밤새 기다리다가 동트는 기미가 보이면 바로 집 밖으로 나가서 서성거리다가 어머니가 깬 기척이 나면 밥을 차려 달래서 먹고는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이른 아침에 학교로 내달리기도 했다. 그때는 나에게 여명이란 귀신이 물러가고 공포에서 평안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당시에도 불면증으로 내내 고생했다. 석 달 동안 입원했다고는 하지만 두 달은 의식을 잃고 있었으니 내가 기억하는 입원기간은 한 달 정도이다. 그러지 않아도 사고에 따른 정신적 충격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웠는데 밤늦은 시간에 간호 보조원이 수시로 들락거리며 혈액 채취한다고 팔에다 주사기를 찔러대고, 눈까풀을 벌리고 플래시로 눈을 비춰보고, 몸을 씻겨 준다고 겨우 잠이 들려고 하는데 깨우고, 청소부가 밤늦게 조심성 없이 쿵쾅거리고 큰 소리로 떠들고 노래하고, 아무튼 환자를 밤새 편히 자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왜 그런 일을 낮에 하지 않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의식이 분명하지 않고 성대에 이상이 생겨 말 못하는 환자라서 가족이 함께 할 수 없는 밤에는 마구 다루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런저런 까닭에 잠을 못이루고 캄캄한 병실에서 밤을 새우기란 정말 외로웠다. 성질이 못된 당직 간호보조원이라도 만나면 자지 않는다고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니 이래저래 서러웠다.
병실의 분위기는 낮과 밤이 매우 다르다. 낮에 만나는 간호사들과 밤에 일하는 간호 보조원들의 성품은 천양지차이다. 가래가 끓어서 숨을 쉬기가 어려워 비상벨을 아무리 눌러도 당직 간호사나 의사가 달려오는 일이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밤마다 생사가 오락가락했기에 매일 밤 불안에 떨었다. (숨이 막혀서 저 세상에 다녀온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이 되면 아내와 딸이 곧 오고 친절한 의사와 상냥한 정식 간호사들이 돌봐 주거니 생각하며 안도하곤 했다. 그때는 나에게 여명이란 불안이 평온으로 바뀌는 시간이었다. 아니, 죽지 않고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병원에서 재활원으로 옮긴 후에는 처음 며칠 동안만 불면증으로 고생했을 뿐, 석 달간의 입원 기간 내내 잠을 못 이루어 고생한 적은 별로 없었다. 아마 살아났다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편안했나 보다. 밤새 계속되는 기침으로 잠을 이루기 어려울 때라도 산소 호흡기를 끼면 그럭저럭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재활원은 병원보다 시설이 낙후되었지만 대학병원과는 달리 밤새 간호사들이 들락거리며 이것저것 살펴 주고 비상벨을 누르면 바로 달려와 주어서 캄캄한 밤에도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매일 아침 아직도 어둑어둑할 때에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오면 늘 손짓으로 블라인드를 위로 끝까지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동트는 걸 느끼고, 조금이라도 더 많이 햇살을 받고 싶어서였다. 얼마 후에 동트기 시작하면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하루 더 살 수 있거니 생각하면 참 기뻤다. 그리고는 다짐했다. 퇴원하면 매일 새벽에 깨어 페르 귄트의 “Morning Mood”를 들으며 장엄한 아침을 맞이하고 시간을 내어 바닷가에 가서 해 뜨는 걸 꼭 보겠다고.
퇴원하고 몇 달 후에 바닷가를 찾아서 해 뜨는 걸 보며 벅찬 감동을 느꼈고 아침 일찍 일어나 Morning Mood를 두어 번 들은 적은 있지만, 입원 중의 다짐은 그렇게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동이 트는 걸 느낄 때마다 벅찬 감동은 아닐지라도 잔잔한 기쁨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건 얼마나 신나는 건가!
“주 하느님, 아침 하늘이 새날을 알리고, 저희를 둘러싼 모든 피조물이 찬미의 노래를 시작하나이다. 저희는 이제 모든 사람과 온갖 피조물과 더불어 몸과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 저희 마음을 들어 올리나이다.”
(2011년 10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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