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죄수 아닌 죄수, 중환자

삼척감자 2024. 9. 26. 05:13

환자라는 영어 단어인 Patient에는 형용사로참을성이 있는또는끈기 있는이라는 의미도 있다. 환자는 병들었거나 다쳐서 의료적으로 돌보아 주어야 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Patient의 본래 의미는고통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이들 모두를 환자라 부를 수 있으니, 환자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어진다. 죄를 짓거나 전쟁 중에 적군에게 잡혀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자유를 빼앗기고 정해진 공간에 억류된 사람을 죄수 또는 포로라고 부르는데 입원한 중환자는 스스로 원하지 않았는데도 병상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갇혀서 육신의 자유를 잃고 지내니 죄수나 다름이 없다. 건강을 잃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거나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환자는 오히려 죄수보다 더 큰 고통을 받는 셈이다. 환자로 지내려면 어지간한 불편은 참아야 하고 장기간의 투병 또는 치료 기간을 견디는 끈기가 필요하기에 Patient라는 하나의 단어에 환자, 참을성 그리고 끈기라는 의미가 모두 포함된 것 같다.

 

환자로 지내기는 참 어렵고 서럽다. 자신 때문에 덩달아 고생해야 하는 가족 보기 미안해서 그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삭여야 하는 일도 많고 의료진 눈치도 많이 보아야 한다. 미국 병원과 재활원에서 만난 의사들은 대부분 인품이 좋아서 환자의 호소를 열심히 들어주려 하고 환자를 가엾이 여겼다. 미국에서는 의과대학생을 뽑을 때 지원자의 인품을 여러 각도에서 살펴본 후에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던데 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적어도 환자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서 환자와 그 가족을 무례하게 대하는 의사는 본 적이 없다. 의사보다 환자와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며 환자를 보살피는 정식 간호사도 대체로 친절하다. 간호사 한 명이 돌보는 환자 수가 그리 많지 않으니, 한국보다는 환자를 세심하게 돌볼 수 있을 것이다. 중환자실 간호사와 비교하면 일반 병동의 간호사는 돌보는 환자 수가 많아서 그런지 덜 친절하고 때로는 환자를 짜증스러운 태도로 대한다. 그러나 환자 처지에서는 간호사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간호사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른다.

 

그런대로 평화스러워 보이는 입원실도 밤이 되면 사뭇 달라진다. 야간 병실에서는 주로 흑인과 동남아 출신이 대부분인 간호 보조원과 잡역부가 근무한다. 간호 보조원은 환자의 몸을 닦아 주거나 침구 정리 또는 간단한 응급조치를 맡고 잡역부는 청소나 빨래를 주로 담당한다. 야간에 당직 의사도 근무한다던데 한 번도 본 적은 없다. 대학 병원에 있을 때 낮에는 가족이 지켜 보고 의사도 수시로 방문하고 담당 간호사도 늘 가까이 있으니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다. 그러나 가족이 모두 떠난 밤에는 병원에서 지내기가 끔찍하였다. (미국에서는 면회 시간 외에는 가족이라도 병원에 머물 수 없다) 한밤중에 청소한다고 쿵쾅거리고 큰 소리로 노래 부르거나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잡역부들은 환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전혀 없었다. 밤새 떠들거나 불을 환하게 켜둔 채 내버려두어서 잠을 이루기가 어려울 때가 잦았다. 간호 보조원들은 의료인의 기존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새벽 두세 시에 겨우 잠든 환자를 깨워서 몸을 닦는다고 이리저리 굴리기도 하고 때로는 잠자지 않는다고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고 밤새 음악을 틀어서 잠을 이룰 수 없게 하기도 했고 뭔가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환자에게 눈을 부라리며 소리를 질러서 불안하게 했다. 나처럼 가래가 끓는 환자는 가끔 그걸 뽑아 주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가 있다. 숨이 곧 막힐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 채 간호사 호출용 비상벨을 아무리 눌러도 그들이 달려오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어쩌다, 정말 어쩌다 와 보고는 멀쩡한 놈이 왜 귀찮게 사람을 부르느냐고 소리 지르거나 야유를 퍼붓고 돌아섰다. 언젠가는돈 주면 가래 뽑아주지.”하고 약 올리고 돌아서는 여자도 보았다. 나처럼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성대가 망가져서 말을 못 하므로 당하고도 불만을 호소할 수 없는 환자가 그들에게 제일 만만했을 것이다. 대학 병원에 있는 동안 그런 이유로 숨이 멎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 환자에게는 생명이 달린 일인데 그들은 생명을 갖고 장난치는 듯했다. 대학병원에서 겪은 부당한 대우를 정식으로 항의하려고 해도 당시에는 의사 표현 능력도 떨어졌고 특별히 내세울 증거도 없었지만, 입원한 환자는 어쨌든 담당 의료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을의 처지이므로 참는 수밖에 없었다.

 

몇 달 후 기력이 다소 회복되고 나서 옮겨진 재활원의 시설은 대학병원보다 좋지 않았으나 지내기는 훨씬 나았다. 의사 몇 명 외에는 대부분 간호사와 물리 치료사 그리고 일반 직원으로 운영되는 재활원은 치료보다는 재활을 주목적으로 운영되는 곳이니 환자의 생사가 오가는 긴박한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아서 그런지 분위기도 대학 병원보다는 평화로웠고 의료진과 간호사 그리고 직원들 대부분이 친절했다. 대학병원 간호사들보다는 나이 든 간호사들이 밤새 조용히 들락거리며 환자의 상태를 말없이 살펴보고 비상벨을 누르면 1~2분 이내에 달려와서 도와주니 참 마음이 편하고 든든했다. 그래도 밤에는 그들의 지시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고 눈을 부라리며 윽박지르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재활원 입원 중에 의료진의 부적절한 처치를 문제 삼은 적이 한 번 있었다. 성대가 망가져서 음식을 삼키면 폐로 넘어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입원 기간 6개월 내내 배에 삽입된 급식 튜브를 통해 유동식을 공급받았다. 입으로 씹어서 목으로 음식을 넘길 때와는 달리 그리 굵지 않은 급식 튜브로 음식을 넣어 주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물 한 컵 정도 넣는 데도 한참 걸렸고 밤에는 천천히 돌아가는 모터로 튜브를 통해서 유동식을 공급하는데 대개 열서너 시간 정도 걸렸다.

 

재활원에서는 아침마다 물 150cc를 튜브로 넣어 주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까 간호사가 넣어주려고 하는 물의 양이 평소와는 달리 무척 많아 보였다. 며칠 전부터 나를 담당하기 시작한 그 간호사는 내 방에 들어오면 아주 퉁명스럽게 찌푸린 얼굴로, 명령조로 말하여 나는 그녀가 참 싫었다. 옆에 있던 필기구를 집어서 오늘은 왜 이리 물을 많이 주느냐고 썼더니, 그녀를 화를 내며 평소에 마시던 양 그대로라고 했다. “150cc?” “아니다. 450cc를 먹어야 한다.” “확인해 봐라.” “주는 대로 먹어라.” 화를 내며 우기기에 하는 수 없이 주는 대로 다 받았다.

 

바로 운동 시간이어서 물리치료사가 밀어주는 휠체어로, 체육관으로 가는데 속이 몹시 거북했다.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토하기 시작했다. 뱃속에 있는 걸 몽땅 토하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던 그 간호사가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달려와 바닥을 닦고 토사물을 치웠다. 그날 운동을 끝내고 병실에 돌아와서 재활원 원장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기운이 없어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그것도 영문으로 쓰기란 어려웠지만 자초지종을 빠짐없이 쓰려고 애썼다. 환자의 생명이 걸린 일이니 앞으로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해주길 바라고 간호사가 병실에 들어올 때는 환자에게 인사라도 하게 해달라는 내용을 적었다. 아내를 시켜서 편지를 원장에게 전달한 그날 오후에 그 간호사가 쭈뼛거리며 들어와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원장이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간호사의 태도는 눈에 띄게 친절해졌다.

 

퇴원 후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후에 대학 병원을 찾아가 보았다. 나를 구박하던 간호 보조원들은 야간에만 근무하니 만날 수는 없었지만, 정식 간호사들과 의사들은 나를 보고 덥석덥석 끌어안으며 매우 반가워했다. 못된 간호 보조원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지만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시간이 흐르니 미운 감정도 많이 사그라져서 그냥 넘어갔다. 그래도 나를 살려준 병원인데 섭섭한 감정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좀 흘러서 다시 찾아가 본 재활원은 문을 닫고 일반 병원으로 바뀌어서 예전에 근무하던 의료진과 직원은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원장은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어 오래전에 해고되었다는 소문도 들리고. 그래도 몇 달 동안 신세 진 곳인데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없어서 섭섭했다.

 

이 세상 떠날 때는 죄수 아닌 죄수로 병원에 갇히어 고생하다가 떠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고통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빌어 본다.  (2013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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