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영세하고 바로 냉담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거의 하지 않은 분이 암으로 투병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서 우리 옆 동네에 산다는 그분의 연락처를 알아낸 다음에 병원을 방문하였다.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있는 환자의 모습은 피골이 상접하여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팠다. 말하는 것조차 힘에 겨워하는 그분의 목소리는 가냘파서 알아듣기가 매우 어려웠다. 병상 옆에는 손도 대지 않은 아침 식사가 그대로 있었고, 우리가 있는 동안에 간호사가 점심을 가져다주었지만, 음식만 보면 토할 것 같다기에 식사를 권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는 가족이 옆에서 어르고 달래가며 조금씩 자주 음식을 먹도록 해야 할 텐데. 가족은 생업에 바빠서 옆에서 병간호할 수 없다니 안타까웠다. 통증이 심해서 잠을 이루기가 어렵다고 하고 식사를 통 하지 못 하여 거의 탈진 상태인 데다가 강한 진통제 투여로 정신마저 혼미한 것 같아서 환자와 긴 얘기를 못 했다. 떠나오기 직전에 기도를 바치는 나를 따라서 그가 성호를 긋는 걸 보고 용기를 얻어서 병자성사 받기를 권했지만, 확실한 결심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 개신교 신자인 가족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다음을 기약하고 병실을 나오는데 마음이 바빠졌다.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으니, 병자성사를 서둘러 받게 해야 할 텐데.
그를 만나면 해주려고 준비한 말, 이를테면 고통의 의미, 주님께 의지하기, 용기를 줄 수 있는 말 등은 한마디도 못 했다. 병과 싸우며 죽음의 공포로 두려워하고 있을 환자 앞에 앉으니,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외로운 환자에게는 주위의 관심과 사랑 그리고 기도가 절실할 텐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았다.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레지오 단원은 불쌍한 환자들을 방문해서 그들이 당하는 고통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고 올바른 정신으로 그 고통을 참아내도록 일깨워 주어야 한다.” 이 구절을 보고는 내가 환자로 지낼 때를 돌이켜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에게 병으로 고통을 겪어 보지 않는 방문객이 어떻게 고통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고 올바른 정신으로 그 고통을 참아내도록 일깨워 줄 수 있다는 말인가? 끔찍한 고통을 겪어 본 나도 환자를 방문하면 할 말을 잊고, 섣불리 위로의 말을 건네느니 차라리 말없이 기도나 바치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가 잦은데. 건강한 사람이 환자 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당신이 고통에 대해서 뭘 아느냐?”는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나처럼 고통을 벗어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하면 자랑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문병하러 온 사람이 생각 없이 던지는 위로의 말에 속상할 때가 있었다. 목구멍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해서 배에 연결된 급식관을 통해 겨우 기초 대사량 정도로 공급되는 유동식으 로 연명할 때는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리고 공복감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나에게 거의 매주 문병 오던 어느 형제는 방문할 때마다 “뭐든 잘 먹어야 할 텐데.”라는 말을 해서 염장을 지르곤 했다. 사고 후 두 달 만에 의식을 되찾고 다리 하나를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심란할 당시에 방문한 어느 교우가 “빨리 일어나 골프 쳐야지요.”라는 말을 할 때는 어이가 없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내내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날벼락을 맞았는가?”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그동안 지은 죄 때문에 벌을 받았다면, 내가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기에 다리 하나를 잃는 벌을 받아야 하나? 나보다 죄 많은 사람을 꼽으라면 온종일이라도 그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을 방문하신 어느 신부님께서 “스테파노씨가 끔찍한 사고를 당한 건 교통사고일 뿐이지 주님께서 당신이 그동안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이 나에게는 구원이었다. 그 이후 스스로를 들볶던 생각의 사슬에서 풀려나고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최근에 어떤 책에서 "고통은 병을 고치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가 고통을 겪을 때 벌을 받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노 성인(St. Augustine)이 말했다는 글을 보고 기회 있으면 이 좋은 말씀을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들려주면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문병을 다녀온 후에 그분의 대부님에게 전화드리고 함께 일한 적이 있다는 분을 알아내어 그분이 하루속히 병자 성사를 받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며칠 후 구역회에서 만난 그 대부님이 환자를 방문하여 성사를 받도록 설득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었다. 자, 이제는 그분이 하루속히 병자 성사를 받고 신앙심을 되찾고 주님께 의지하여 병을 이겨낼 힘을 얻도록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다. (2012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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