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큰일을 해냈다

삼척감자 2024. 10. 3. 05:33

교통사고로 다리 하나가 절단되고 다른 하나는 망가진 나는 의족을 끼지 않으면 설 수가 없고, 쌍지팡이를 짚지 않으면 몸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 서 있을 때는 언제나 양손으로 지팡이를 짚어야 하므로 일상적인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진공청소기를 끌고 청소하는 건 꿈도 못 꾸지만, 다행히 앉아서 할 수 있는 일에는 문제가 없어서 마늘 까기, 파 썰기, 양파 갈기, 감자 껍질 벗기기 같은 일은 즐거운 마음으로 아내를 돕는다.

 

어쩌다 아내가 저녁에 모임이 있어서 서둘러 성당에 가면 부엌 싱크대에 기대서 설거지도 하고, 가끔은 아내가 멀리하지만, 나는 즐기는 국수를 끓이거나 간단한 요리를 직접 하기도 한다. 물론 균형을 잃고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뜨거운 기름이나 물이 튀어서 얼결에 넘어지지 않도록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다.

 

아파트에 사니 아파트에서 설치해 준 시설물이나 가전제품의 고장 수리는 연락만 하면 관리인이 당일로 수리해 주니 다행이다. 천정에 설치된 전구가 수명이 다하면 아내가 의자에 올라가서 교체한다. 그리 무겁지 않은 쓰레기 봉지는 운동 삼아 복도를 걸을 때 내가 지팡이를 짚은 손으로 요령껏 들고 층마다 있는 쓰레기 투입구에 갖다 넣는다. 투입구를 통해 떨어진 쓰레기는 그때마다 1층에 있는 엄청난 크기의 쓰레기 압축기에 떨어져서 바로 압축된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식기 세척기에 부품을 끼우는 일이었다.

오랫동안 사용한 식기 세척기가 낡아서 새 걸로 교체해 달라고 했더니 관리인인 호세가 똑 같은 제품을 사 와서 설치해 주었는데 위쪽 시렁에 좀 문제가 있었다. 설치한 다음 날에 시렁을 당겼더니 레일 밖으로 쑥 빠져 나왔다. 시렁을 밀어주면 너무 레일이 뒤쪽으로 밀려가서 덜컹거렸다. 셔츠용 옷걸이를 잘라 낸 철사로 시렁과 레일 앞쪽 끝을 묶었더니 처음에는 문제가 없더니 몇 번 쓰니 뻑뻑해서 잘 움직이지 않았다. 굵은 실로 다시 묶어도 시렁이 덜컹거렸다.  토요일 오후에 관리인과 연락이 되지 않아 주말 내내 세척기 때문에 신경이 쓰일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호세가 두고 간 매뉴얼을 보아도 알 수 없어서 인터넷으로 세척기의 분해도와 부품을 찾아보았더니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레일 앞쪽 끝부분에 시렁이 빠져 나오지 않게 정지시키는 플라스틱 부품이 빠진 것이었다. 부품 봉지에서 빠졌거나 아니면 호세가 실수로 조립하지 않았을 것 같았지만,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때 기특한 생각이 떠올랐다. “전에 쓰던 세척기에서 그 부품을 빼다가 쓰면 되겠다드라이버와 니퍼 한 개씩을 호주머니에 넣고 서둘러 쓰레기 압축실로 내려가 보니 구석에 우리 부엌에서 뜯어낸 식기 세척기가 있었다. 아마 주말 직전이라 미처 버리지 않고 둔 것 같았다. 그런데 혼자 넓은 압축실에 버려진 기계에서 부품을 뜯어내려니 마치 남몰래 도둑질하러 온 것처럼 불안했다.

 

부품을 뜯어내기란 쉽지 않았다. 몸이 균형을 잃고 쓰러지지 않도록, 손댈 때마다 조금씩 기우뚱거리는 기계를 한 손으로 잡고 허리를 굽히고, 한 손으로만 작업하려니 오죽했겠는가? 뜯어낸 부품을 새 기계에 조립하는 것도 어려웠다. 작업이 어려운 건 아닌데 조심, 조심, 또 조심, 안전제일을 염두에 두고 일을 하려니 시간도 걸리고 힘들어서 땀이 쉴새 없이 흘렀다.  

 

그럭저럭 일을 마치고 아무 문제 없이 시렁이 들락날락하는 걸 보니 고난도 공사를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그 일을 마친 지 며칠이 지났건만, 오가며 세척기의 시렁을 일없이 당겼다 밀었다 하며 오랜만에 남자 구실을 해낸 것처럼 흐뭇해한다.

 

장애인으로 살다 보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괜히 눈치를 보거나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 한다는 자격지심에 사로잡힐 때가 잦은데 모처럼 이런 일을 해내니 자랑스럽다. 남들 보기에는 우스운 일이겠지만. 

 

(2017 1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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