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Me Before You를 보고
‘그대 앞의 나(Me Before You)’라는 영화는 흔한 로맨스 영화 중 하나이지만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6년간 일해온 카페가 문을 닫으며 하루아침에 실직한 루이자 클라크(26세),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해서 전신 마비 장애인을 간병하는 일에 지원하게 된다. 그녀가 돌봐야 하는 윌 트레이너(31세)는 부유한 상류층 출신에 인물까지 잘생겼고 만능 스포츠맨에 유능한 사업가였는데, 오토바이와 충돌하는 사고로 목 아래가 마비된 후 까칠한 성격으로 변한 인물이었다.
7년 동안 사귀며 결혼을 약속했던 매력적인 애인이 사고가 난 후에 떠나고, 유능하고 활동적이며 자존심이 강한 윌은 앞으로도 평생 남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자 조력(助力) 자살(적극적 안락사)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걸 합법적으로 시행하는 스위스로 가기로 마음먹는다. 윌의 부모는 그와 6개월간 유예기간을 두고 신중하게 생각해 보기로 합의하고 그동안 성격이 밝은 젊은 여성에게 윌의 뒷바라지를 맡겨 보기로 한다.
성격이 밝고 수다쟁이인 데다 우스꽝스러운 옷을 입는 루이자는 매사 냉소적인 윌에게 좋은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좋은 급여에 끌려서 6개월만 버티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이 6개월 동안 두 사람은 조금씩 마음을 열고 사랑의 감정을 키운다. 루이자는 이 상황을 힘들어하는 윌에게 세상은 아직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걸 알려주려 했고, 윌은 루이자의 마음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된다.
6개월의 유예기간이 끝나갈 무렵, 윌은 사랑하는 루이자를 남겨두고 원래의 계획대로 안락사를 택한다.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어서 루이자에게 평생 의지해야 하는 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루이자는 윌의 뜻을 막지 못하고 함께 스위스로 향한다. 윌은 루이자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건넨 다음, 마지막 순간은 가족들과 따로 맞는다 .
떠나기 전 윌은 루이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긴다.
“클라크.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내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주쯤 흘렀겠죠. 내가 시킨 대로 했다면 당신은 지금 파리에 있겠네요. 하고 싶었지만 못했던 말이 몇 가지 있었는데, 지금 말합니다. 영국에 돌아가면, 나의 유언 집행을 맡은 변호사가 당신 이름으로 예금된 은행 계좌를 줄 겁니다. 그 돈은 새로운 시작을 할 정도가 될 거예요. 너무 놀라지는 말아요. 여생을 편히 먹고 살 만큼 충분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이걸로 자유를 살 수 있을 겁니다. 그 가능성을 당신에게 줬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위로를 받는 느낌이에요. 당신은 내 심장 깊이 새겨져 있어요, 클라크. 처음 걸어 들어온 그 날부터 따스한 미소와 우스꽝스러운 옷들, 썰렁한 농담과 감정이라곤 하나도 숨길 줄 모르는 무능력까지. 내 생각은 너무 자주 하지 말아요. 슬퍼하는 건 원치 않아요. 그냥 잘 살아요. 그냥 살아요. 당신의 걸음걸이마다 함께 걸을게요. 사랑하는 윌이.”
부유한 남성과 가난한 여성이 만나고, 서로를 알아가며 점점 사랑하게 되며, 절망에 빠졌던 남자가 행복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전반부는 흔한 로맨스 영화이다. 그리고 신분이 낮은 여성이 상류층 남자의 도움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다소 식상한 신데렐라 스토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안락사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룬 영화이다. 그런데 자신은 죽음을 택하면서 두고 가는 사랑하는 여성에게 “그냥 잘 살아요(Just live well.). 그냥 살아요(Just live.”라는 말을 남기는 건 또 무슨 아이러니일까?
이 영화는 장애인은 가족에게 부담이 되므로 장애를 안고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이유로 ‘장애인 인권 운동’ 단체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다. 나는 이 영화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를 안일하게 다루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장애인이어서 그렇게 느꼈을까?
"안락사"로 흔히 번역되는 단어 "euthanasia"는 그리스어로 직역하면 "아름다운 죽음"이란 뜻이다. 현대의 "유타나시아"는 원어의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생물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생물을 고통 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인위적인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게 다 말장난인 것 같다.
모든 죽음은 예정되어 있지만, 예정된 대로의 죽음은 없다. 죽음을 극복하려는 시도들은 저마다 인간 세상의 큰 가르침이 되었지만 우리는 그것이 던지는 질문 앞에 늘 막막해한다. 인위적으로 죽음을 결정하는 건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게 아닐까?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의 입장에서는 “왜 죽어가는 이에게 고통을 견디라 하는가?”라고 질문할 수 있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죽음을 앞당기고 고통을 줄여 달라고 환자가 요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 것인가?
(2019년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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