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한국에서 탈북 병사 오청성과 그를 치료하는 이국종 교수 그리고 아덴만의 영웅 석해균 선장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듯하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교수와 석 선장은 탈북 병사의 치료와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관해 말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용어인 PTSD란 신체적인 손상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고에서 정신적인 외상을 받은 후에 나타나는 질환으로서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나도 교통사고 후에 이 질환으로 고생했고 사실은 지금도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사고 후 두 달 만에 중환자실에서 깨어나자 망가진 육신도 고통스러웠지만,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사고 당시의 기억 때문에 견디기가 어려웠다. 차에 치일 때의 충격, 너덜거리던 두 다리, 구급차에 실려서 병원으로 떠나자마자 정신을 잃고…이런 기억이 끊임없이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그때마다 사고를 다시 겪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도 다 잊었다고 생각한 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라 깜짝 놀랄 때가 있으니 그 기억은 참 질기기도 하다.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위험한 고비를 다 넘긴 다음에는 망가진 몸을 보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성대가 주저앉아서 입으로 먹고 마실 수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무슨 수를 쓰든 죽어야 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는 종일 병상에 누워 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서 고생했다. 강한 진통제와 수면제를 계속 투여받았지만, 약조차 듣지 않는 지독한 불면증이었다. 육신의 고통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더 심했다. 요즈음도 가끔 악몽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이제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잠 못 이룰 때면 차라리 일어나 책상 앞에 앉는다.
기력을 회복하여 재활훈련을 시작하며 생각이 차츰 바뀌었다. 잃어버린 것은 빨리 잊으려 애쓰고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기 시작하니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고, 잃었던 신체 기능을 차츰 회복하기 시작하니 참 행복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다리가 없어도 휠체어로 이동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절단되고 망가지고 피부 이식으로 보기 흉한 다리, 길쭉한 수술 자국이 남은 배는 옷으로 가려지니 다행이고, 드러나는 잘생긴 얼굴과 팔은 멀쩡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성대 수술로 목소리를 되찾았고 먹고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참 다행스럽다. 잔뜩 쉰듯한 목소리가 거슬리기는 해도 그 핑계로 싫어하는 억지 노래를 안 해도 되니 태생 음치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의족을 끼고 쌍지팡이를 짚었지만, 느릿느릿 걸을 수 있으니 참 다행이고, 그 때문에 특별한 대접을 받기도 하니 때로는 신분이 상승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지금은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거의 극복한 셈이지만, 그래도 아내가 운전하는 자동차만 타면 불안하다. 우리 자동차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와 부딪힐 것 같아서 불안하고, 앞차와 좀 가까워지면 충돌할 것 같아서 나도 모르게 신음을 내기도 하고 큰 소리로 아내에게 잔소리한다. 이 증상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또 있다. 별 것 아닌 일에 신경이 예민해지고 불안하며 쉽게 흥분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하기가 꺼려져서 아예 전화기를 꺼놓을 때도 있다. 작은 일에 쉽게 놀라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전문가는 이런 것도 사고 후유증이라고 하지만, 소심한 내 성격 탓도 있는 듯하다.
사고로 잃은 것도 많지만 얻은 것도 적지 않다. 살아 있다는 게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되었고, 죽을 고비를 넘기지 않았더라면 당연하게 여겼을 것들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고, 작은 일에 자주 감사하게 된다. 의식을 회복한 후에는 아침마다 해가 뜨는 걸 느낄 때마다 행복하고 고마웠을 정도였다.
때로는 갑자기 찾아오는 통증이 견디기 힘들어도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되고, 가족과 이웃에게 이전보다 더 많은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나와 하느님이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등 큰 사고를 겪은 게 내 삶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바로 그런 게 외상성 스트레스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탈북 과정에서 총격을 받고 온몸이 상한 병사 오청성이 겪게 될 육체적 정신적 후유증을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아직 젊으니 몸이야 빨리 회복되겠지만, 정신적인 외상은 오래 가니 그게 걱정스럽다. PTSD라는 용어, 나는 그 놈과 벗삼아 지내지만, 아직도 이 용어가 낯설다. (2017년 12월 5일)
'교통사고 이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락사에 대하여 (1) | 2024.10.02 |
---|---|
아침마다 해가 뜨고 저녁마다 해가 진다 (1) | 2024.10.02 |
삼킴 장애에 대하여 (0) | 2024.10.02 |
먹고 마시고 말할 수만 있어도 (2) | 2024.10.02 |
뒷간에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이 다르다 (0) | 2024.10.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