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는 가끔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입원 중에 일종의 사고로 숨이 넘어가서 스스로 숨을 쉴 수 없게 되자 급히 후골(喉骨=Adam’s apple) 바로 밑을 절개하여 인공호흡기를 허파 깊숙이 밀어 넣는 과정에서 성대가 망가지고 삼키는 기능도 잃게 되어 반년 가까이 말 한마디 못 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 하고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동안 어찌나 힘들었던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치밀어 오르곤 했다.
반년쯤 지나서 성대 복원 수술을 받고 목소리를 되찾기는 했지만, 늘 쉰듯한 목소리가 난다. 잠을 설쳤거나 피곤한 날에는 그 목소리나마 잘 나오지 않아서 그럴 때는 꼭 필요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지 않아도 말주변이 없는데 이런저런 핑계로 말을 아끼니 점점 말이 줄어든다.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인공호흡기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목소리를 영원히 잃었다던데, 그래도 나는 이렇게나마 말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후골 바로 옆을 가로로 길쭉하게 절개한 수술 자국과 후골 바로 아래에 인공호흡기 연결을 위해 구멍을 뚫었던 흔적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어서 낯선 사람들 앞에서는 제일 위 단추까지 채워서 목을 가리려 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무심해진 편이다. 그러나 가끔 거울을 보다가 그런 흉터에 눈길이 가면 마음이 아프다. “아,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한 내 모가지여, 목이여, 목님이여.”
술꾼으로 널리 알려진 나는 술자리에서 안주나 밑반찬이 나오기도 전에 그사이를 못 참아 술병을 끌어당겨서 자작하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술을 먼저 마신다는 핑계를 댄다. 잘 나오지 않던 목소리도 술 한 잔이 들어가면 잘 나오는 것 같아서였다. 어느 날 내과 의사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술이 성대에 미치는 좋은 영향에 대해 체험담을 늘어놓았더니, 그 의사는 전공 분야가 아니라서 확실히 모르겠다면서도 “뭐, 그럴 수도 있겠지요.”라며 마지 못해 장단을 맞춰 주었다. 의사의 인정 비슷한 걸 억지로 받은 후로는 나도 술을 마시면 목소리가 잘 나온다는 믿음 비슷한 게 생겼다. 술자리에서 제일 먼저 술잔을 들 때마다 그런 얘기를 했더니 이제는 나이 드신 분들도 ‘위하여’도 하지 않고 장유유서도 무시하는 나의 무례를 눈감아 준다.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그 믿음이 밑바닥부터 흔들리는 일이 일어났다.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느 젊은 여자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 그러니까 미국에서 버터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표준어로, 그것도 아주 예의 바르게 전화를 걸어왔다. 한국에서 유학 와서 타 주에서 학위를 받고 우리 성당서 가까운 대학에서 음성 재활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임상시험에 필요하니 70세 이상 미국 노인들 몇 분을 소개받았으면 한다는 용건이었다. 그 실험이 영어를 말할 때의 주파수를 분석하는 방식이므로 원어민이 아니면 안 된다고 했다.
한인 성당에 미국인 노인이 있을 리가 없어서 도움은 줄 수 없었지만, 내가 몇 달 동안 speech therapy를 받은 체험을 얘기하다가 목소리가 잘 안 나올 때 술을 마시면 도움이 되더라고 했더니, 알코올은 성대에 해가 될 뿐이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으니 가능하면 술을 마시지 말라고 조언했다. 차 종류도 도움이 되지 않으니 성대를 생각한다면 오로지 물만 마시라고 했다. “술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건 아마 기분상 그랬을 겁니다.”라는 말을 듣고 나니 그동안 시원찮은 목소리를 핑계 삼아 술을 탐한 게 부끄러웠다.
목소리를 되찾기 위해 받은 몇 달 동안의 성대 재활 훈련은 참 재미없고 지루했다. 턱밑 성대 부근에 전기 자극을 받으며 연신 혀를 입안에서 위아래, 앞뒤 그리고 왼쪽 오른쪽으로 굴리는 훈련은 따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물리 치료사가 상냥하고 날씬한 아일랜드계 미인이라서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훈련 도중에 가끔 준비된 공책에 볼펜으로 써서 그녀에게 물었다.
“이 훈련을 마치면 정말 말하고, 먹고 마실 수 있게 될까요?”
“후골 밑 구멍을 막으면 소리가 새지 않을 테고, 성대 복원 수술도 받을 테고, 음성 재활 훈련도 받고 있으니 기다려 봅시다.”
그래도 말하고, 먹고 마시고 하는 소망이 간절해서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그녀는 얼음을 눈곱만하게 조각 내어 입에 넣고 삼키는 모습을 관찰하기도 했는데 한 방울이 채 못 되는 물이라도 목구멍으로 넘기면 온몸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더 시간이 지나니 아이스크림을 찻숟가락 하나만큼 입에 넣어 주고 삼키는 걸 관찰했는데, 아이스크림이 그렇게 향기로운 줄은 그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 많이 주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조금이라도 허파로 바로 내려가면 목숨이 위태로운지라 냉정하게도 딱 한 번씩만 주어서 매우 서운했다.
얼마 후에는 비중이 높아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특별한 물을 조금씩 입에 넣어주며 삼키는 모습을 관찰하더니 많이 좋아졌다고 느꼈는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얼음 조각, 유동식, 비중 높은 물을 번갈아 먹이고 그때마다 삼키는 모습을 엑스레이로 찍고 녹화하여 분석했다. 그리하여 성대가 망가지고 거의 반년 후 성대 복원 수술을 거쳐서 말할 수 있게 되었고, 삼키는 모습을 엑스레이로 찍고 분석한 후에 드디어 이제는 먹고 마셔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게 11년 전 12월 어느 날이었다.
먹고 마시고 말할 수만 있어도 행복할 거로 생각했던 내가 이제는 이런저런 욕심이 많아져서 그런지 11년 전 어느 날보다 행복하지 않다.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면 먹고 마시고 말하는 거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체험을 한 내가 그렇다.
(2017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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