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이후

삼킴 장애에 대하여

삼척감자 2024. 10. 2. 00:55

삼킴장애란 음식을 삼키기가 어려운 증상이다. 삼킴장애가 있으면 입에서부터 위까지 음식물이 매우 천천히 내려가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움직여 목에 막혀있는 같은 느낌이 든. 뇌졸중 환자나 50 이상 노인 또는 큰 수술을 받고 목 근육이 약해진 사람에게 주로 발생한다. 삼킴장애가 나타나면 약화된 근육 때문에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갈 있는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분의 장례미사에 참례하고 그분이 뇌졸중 후에 생긴 삼킴장애 때문에 18년 동안이나 고생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분이 삼킴장애로 고생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고생하신 건 몰랐다. 미각은 그대로인데 삼킬 수가 없어서 음식을 입으로 씹은 후 깔때기에 뱉어서 튜브를 통해 위장에 넣었다니 그 고초가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다. 그런 모습을 가까운 가족에게도 보여줄 수 없어서 늘 혼자서 식사했다니 그분의 삶은 참 외로웠을 것 같다. 오래전 그분 댁을 방문했을 때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꺼내 권하며 자신은 아무것도 마시지 않던 게 생각났다.  

 

나도 교통사고 후 반년 동안 삼킴 장애로 고생했던 적이 있었다. 교통사고 후 자가 호흡을 하지 못해 인공호흡기를 폐에 연결하기 위해 급히 기관지를 절개하고 기도삽관(氣道揷管)한 이후에 삼키는 근육과 성대에 문제가 생겨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말 한마디 못하게 된 것이다. 없는 기운을 짜내어서 공책에 글을 써서 소통하기란 정말 힘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먹고 마실 수 없어서 위장에 연결된 급식 튜브로 유동식을 공급받아 연명하는 게 끔찍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그렇게 지내야 할 지, 아니면 삼키는 근육이 회복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는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절망했다. 칼릴 지브란의 책 예언자중에서 먹고 마심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 나오는 그대가 대지의 향기로 살아갈 수 있으며, 식물처럼 공기와 빛에 의지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이라는 대목이 저절로 떠올랐다. 인간이 식물처럼 먹고 마시지 않고 살 수 있다면 그런 고통을 겪지 않을 텐데.

 

기력이 차츰 회복되자 입원해 있던 재활원에서 거의 매일 삼킴장애 회복 훈련을 받았다. 그 훈련은 턱밑에 전극을 부착하여 삼키는 근육에 자극을 주는 동안 물리치료사의 지시에 따라 실시하는 입술운동, 혀 운동 그리고 호흡운동이었다. 모두가 단조로운 반복 운동이어서 참 지루했다. 그나마 물리치료사가 날씬하고 젊은 아일랜드계 미녀인 데다가 상냥하고 친절해서 지겨운 훈련도 견딜만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코딱지만한 얼음 조각, 눈꼽만한 아이스크림 그리고 무거운 특수한 물을 병아리 오줌만큼 차례대로 먹고 마시게 하고는 그것들이 목을 넘어가는 걸 엑스레이 동영상으로 찍은 다음 나중에 다시 돌려보며 자세히 검토했다. 두 달 정도 매번 검사에 통과하지 못했다.”라는 물리치료사의 말을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석 달 정도 훈련을 받은 다음에 실시한 검사에서 축하합니다. 검사에 통과했습 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삼킴 장애 회복 훈련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설사 삼키는 데 문제가 있어도 다른 방식으로 영양을 섭취할 수 있으니 당장 생명 유지에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고 본인 외에는 그 고통을 모르니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훈련에 드는 비용은 물론 쇠약한 환자에게 거의 매일 교통편을 제공하고 시간도 할애해야 하므로 가족도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한국에 있는 가족 중 한 사람이 비인두암이라는 희소 암으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린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가 후각과 미각을 상실하고 음식을 먹는 것도 고통스러워한다는 말을 들으니 참 마음이 아프다. 하느님은 어째서 그토록 선한 사람에게 이렇게 극심한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알 수가 없다.

 

오늘 아침에 칼릴 지브란의 먹고 마심에 대하여라는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그의 글이 한가하고 공허하게 들린다. 먹고 마실 수 없거나 먹고 마시는 게 고통스러운 사람에게 그런 고상한 글이 가슴에 와닿기나 할까? 

 

(2019 1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