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0년 전에 교통사고로 입원 중 두 달 가까이 혼수 상태에 빠졌었다.
그러던 어느 날 넓은 건물 안에서 정신을 차렸다.
실내가 무척 어둡기는 했지만, 가까스로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여기가 어딜까?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을까?
내가 다니는 성당은 아니고, 두 딸이 다니던 대학교 예배당인가? 거기도 아니었다.
수많은 긴 의자가 줄 이어 설치되었고, 내부 장식을 보니 성당이 맞기는 한데,
낯익은 곳은 아니었다.
긴 의자 몇 개에는 서류 더미가 잔뜩 쌓여 있거나,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가까이 지내는 M 형제가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마 그와 나, 둘이서 성당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던 듯 싶다.
밖에 눈이 무척 많이 내려서 일 끝내고 집에 갈 일이 걱정이라고 그가 말했다.
멀리서 구급차가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내 몸이 축 늘어졌다.
발끝부터 시작해서 다리 위쪽으로 서서히 기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 아니 황홀했다.
그게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나중에 혼수 상태에서 깨어난 후 아내에게 들은 얘기로는 숨이 넘어가서 급히 심폐소생술을 받은 후에 소생한 적이 있었다고 하니 바로 그때 저세상에 다녀왔었나 보다.
혼수 상태에 일어난 일 중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강한 진통제로 마약을 거의 매일 투여받았기 때문인지 희미하게 남은 기억도 단편적이고, 그나마 실제와는 달리 왜곡되었겠지만, 앞서 말한 기억은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고 참 생생하다.
입원했던 때는 한여름철이었는데, 폭설 내린 날 어두운 성당 안에서 일하던 꿈인지, 환시인지를 본 건 당시의 암담한 심정이 투영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M 형제와 나, 둘 다 50대, 좋은 나이였는데 어언 20년 세월이 흘러 그와 나, 모두 70대 노인이 되었다.
그런데 의식이 사라지는 과정에서 편안함과 황홀감을 체험한 후로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많이 사라졌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하거나 암시하는 꿈을 예지몽(豫知夢)이라고 한다. 꿈에서 본 내용이 이후 현실에서 그대로 또는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말하는데, 사고 후 일 년여가 지나서 신부님의 요청에 따라 성당 사무실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12년 동안이나 크고 작은 성당 일에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으니 그게 예지몽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짧지 않은 세월 눈물 나게 적은, 용돈인지 수고비인지를 받으면서도 사고 이후에 나를 위해 꾸준히 기도해 준 교우들에게 그렇게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하다가 은퇴 후 이사하며 성당을 옮겼다. 이제는 나이 들어서 체력도 많이 떨어지고, 지금 다니는 성당의 사정에 밝지도 않아서 성당 일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괜히 그러다가는 나이 들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잔소리한다는 말 듣기 십상이지. 이제는 꼰대란 말이라도 듣지 말아야지.
(2025년 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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