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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서 만난 친구, 그리움으로 남다

어제 새벽, 중학교 동창생인 Y를 꿈에서 보았다. 잠에서 깨어 시계를 보니 세 시가 조금 지난 시각이었다.중학교 시절, 그는 잘생긴 학생이었다. 나도 그랬다.그는 공부도 잘했다. 나도 그랬다.사실은 내가 조금 더 잘했지만, 시골 중학교에서의 성적 차이라 해 봐야 거기서 거기였다.당연히 우리는 친하게 지냈다. 하지만 내가 그를 따라갈 수 없는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책을 낭독할 때 마치 라디오 드라마의 성우처럼 멋진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시골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K대학교 국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언론계에서 일했다고 들었다. 잠에서 깨어 지난 일을 되짚어 보았다.몇 년 전, 아마도 10여 년쯤 되었을까. 친구를 통해 그와 연락이 닿았지만,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했다. 대학 시절 학생운..

시간여행 2025.06.16

품의서와 을의 기억

50년 전, 회사에 처음 입사하자 한 선배 사원이 사내에서 사용되는 각종 문서 작성법을 차근차근 가르쳐주었다.“이건 기안 A, B지(紙), 이건 통신 A, B지, 이건 기획 용지…”그렇게 다양한 문서의 작성 방식에 익숙해진 다음에는 타 부서에 보내는 통신문부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문서 작성에 숙달되자, 이번엔 중요한 사안에 대해 상급자를 거쳐 중역의 결재를 받는 품의서 작성법을 배웠다. 품의서는 조직 내에서 특정 사안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기 위해 작성하는 공식 문서로, 회사나 공공기관 등에서 업무 관련 의사 결정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된다. 그 주된 목적은 상급자나 관련 부서의 승인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 필요한 배경 정보와 사유를 명확히 전달하고,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책임..

시간여행 2025.06.11

일 좀 똑똑이 해

6월 4일 아침 산책을 나서다가 보니, 집 현관 외등이 켜져 있었다. 옆집도, 앞집도 마찬가지였다. 건물 전체의 외등이 모두 켜져 있었다. 우리 콘도미니엄의 외등은 태양광 센서에 따라 자동으로 켜지고 꺼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입주자인 내가 직접 조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외등이 켜진 현관 사진을 찍어 단지 관리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 대낮에 외등이 켜지지 않도록 점검을 철저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하루, 이틀이 지나도 외등은 여전히 밤낮으로 계속 켜져 있었다. 6월 6일 아침 산책 중 우연히 관리인을 마주쳤기에, 불필요한 전력 낭비를 막기 위해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 달라고 직접 요청했다. 그는 “알겠다”고 응답했지만, 말투가 퉁명스럽고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동양인에..

미국 생활 2025.06.09

HEBREWS Coffee

영어로 Dad Joke라는 말은 주로 나이가 든 사람들이 하는 썰렁하고 진부한 유머를 뜻한다. 나는 이 말을 한국어로는 ‘꼰대 개그’로 번역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재 개그’라는 표현이 훨씬 더 널리 쓰이고 있었다. 하긴 ‘꼰대’라는 멸칭보다는 ‘아재’라는 말이 훨씬 더 친근하게 들린다. 최근에 들은 아래의 농담도 어쩌면 아재 개그일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꽤 재미있었다. 어느 부부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누가 내려야 하느냐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아내는 말했다.“당신이 먼저 일어나니까 당신이 커피를 내려야 해요. 그래야 내가 기다리는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남편은 맞섰다.“아니지, 당신이 요리를 맡고 있으니까 커피도 당신 몫이지. 나는 그냥 준비된 커피를 마시면 되는 거고.” 그러자 ..

이것저것 2025.06.07

먹고 마심에 관하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의 ‘예언자(The Prophet)’』는 주인공 알무스타파(Almustafa)가 사랑, 결혼, 자녀, 일, 자유, 슬픔과 기쁨, 법, 우정, 시간, 죽음 등 삶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신의 통찰을 나누는 내용이다. 시적인 언어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삶의 본질을 깊이 성찰하는 이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는 20대 중반, 강은교 시인이 번역한 이 책을 구입한 뒤 수십 년 동안 곁에 두고 틈틈이 읽었다. 영문판도 함께 구해 두 언어로 표현된 문장을 비교하며 여러 차례 읽었기에, 알게 모르게 내 삶의 방향과 생각,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언자’는 ‘내 인생의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결하지만 품격 있고..

이것저것 2025.06.01

내가 스무 살 가까이 젊어 보인다니

우리 이웃에 사는 조(Joe)는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키 큰 백인 남자다. 아이는 없고 부부 둘이 사는데, 트럭 세 대와 승용차 두 대를 보유할 만큼 차가 많다. 그는 늘 차 밑에 잭을 받쳐 놓고 손질에 여념이 없다. 얼마 전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나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중고차를 수리해 되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IT 전문가라고 했다. 아무리 봐도 전문직 종사자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가끔 자동차를 손보며 푼돈을 버는 노동자 같았다. 넥타이는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았고, 늘 입고 있는 기름 묻은 작업복 차림에 공구 상자가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쩌다 주차장에서 차를 고치다 마주치면 간단한 인사만 나누던 그가, 어제는 조심스럽게 ..

미국 생활 2025.05.23

세탁기가 수명을 다했다.

세탁기가 수명을 다했다.건조기도 작동이 시원치 않아, 이참에 둘 다 새것으로 바꾸기로 했다.먼저, 이 집에 살던 할머니가 부엌의 작은 식품 저장실 선반에 모셔두었던 매뉴얼들 중에서 세탁기와 건조기 매뉴얼을 찾아보았다. 표지에는 ‘구입일자: 01/01/15’라고 적혀 있었다. 보통 이런 가전제품의 기대 수명은 12년 내외인데, 우리 집에 설치된 것들은 무려 24년이나 작동했으니 거의 두 배의 수명을 누린 셈이다.제조회사는 Kenmore였다. 이 회사는 몇 남지 않은 미국 가전제품 브랜드 중 하나인데, 대부분의 제품을 외주로 생산하면서 Sears의 자회사로 오랫동안 존속해 오고 있다. 우리 집 기계들의 상태를 보면, 품질 관리가 꽤나 철저했던 것으로 보인다.동네 가전제품 매장에 들렀더니, 내 나이 또래로 보..

미국 생활 2025.05.16

낚시로 큰 잉어를 잡는 꿈

나는 작은 배를 타고 손에 낚싯대를 들고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산 여러 개가 시야를 가렸다. 강 같기도 하고, 바다 같기도 했다. 갑자기 낚싯대가 움직였다. 반사적으로 끌어올려 보니, 꽃게 한 마리가 미끼를 감싸 안고 매달려 있었다. 죽을 줄도 모르고 보잘것없는 먹이를 탐하는 꼴이 딱했다. 잠시 후, 낚싯대가 다시 요동쳤다. 묵직한 무게를 느끼며 힘겹게 끌어올리니, 노란 색깔이 비치는 짙은 초록색 물고기가 매달려 있었다. 비늘 무늬가 선명한 것이 싱싱한 잉어였다. 꽃게에 잉어라니, 여기가 강인지 바다인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꿈에서 본 잉어를 떠올리며, ‘이건 분명히 개꿈이 아니라 길몽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길몽은 발설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경제공동..

이것저것 2025.05.13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드디어 인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끝까지 다 봤다. 하루에 한 편씩 봤으니 총 16일 만에 완주! 사실 나는 한국 드라마를 잘 안 본다. 줄거리가 거기서 거기 같고 감정이입도 잘 안 돼서인데, 결정적으로 너무 재미있어서 한 번 빠지면 정신 못 차리고 몰아보게 되니 체력 소모가 장난 아니어서 일부러 피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사정이 좀 달랐다. 작은딸이 이미 다 봤다고 자랑하고, 큰딸도 슬쩍 관심을 보이니 우리 부부도 "이건 안 보면 안 되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폭싹 속았수다'는 부모와 자식의 밀당(?)을 현실감 있게 그리면서 세대 차이도 자연스럽게 녹여낸 작품이다. 애들이 부모한테 거침없이 자기 할 말을 다 하고, 가끔은 "저건 좀 선 넘은 거 아냐?" 싶은 장면도 나오는데, 그게 꼭 무례..

가족 이야기 2025.0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