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그러니까 1950년~60년 대에 강원도 시골에서는 화장실을 변소, 뒷간, 작은집 정낭, 통시 등으로 불렀다. 이런 단어만 들어도 작은 직사각형 구멍 아래로 쌓인 대변 덩이가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던 재래식 시골 변소가 연상된다. 대개 집에서 좀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데다가 대개는 전등마저 없어서 밤에는 혼자 볼일 보러 가기가 무서웠다.
아버지의 전근으로 바닷가 마을인 M 읍의 중학교에 전학하니 읍내 여러 업소의 변소에서 가끔 부서질 것만 같은 문짝에 쓰인 W. C. 라는 글씨를 볼 수 있었다. 대개는 정자체가 아니고 삐뚤빼뚤 페인트로 쓴 글씨가 아래쪽으로 번지기까지 했으니, 변소라는 분위기를 제대로 살린 셈이었다. 그 뜻을 몰랐어도 지저분한 주변, 향기롭지 못한 냄새로 은밀한 일을 해결하는 곳이라는 걸 알 수는 있었다. 그래도 W. C. 가 무슨 뜻인지 궁금했던지 영어 시간에 누군가가 그 의미가 무언지 물었더니 영어 선생은 천연덕스럽게 “그게 워싱턴대학교(Washington College)의 약자지. 미국에서는 변소를 고상하게 워싱턴대학교라고 에둘러 부른다.”라고 했다. 하늘 같은 선생님의 권위를 믿었기에 학생들은 다들 그 설명을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얼마 후 어떤 장난꾸러기 녀석이 다른 선생님의 수업 시간에 손을 번쩍 들더니 ‘Washington College’에 다녀 오겠다고 하자 선생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그 학생이 ‘W. C.라는 약자로 표시하며 미국에서는 워싱턴대학교라고 불린다는 변소라는 곳에 다녀 오겠다고 말이라고 하자, 그 선생님 한참 동안 웃음을 참지 못하여 수업이 중단될 정도였다.
그게 60여 년 전 일인데, 휴전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라 교사가 부족해서 단기 교원 양성을 통해 교사가 배출되고, 한 선생이 두 개 정도의 과목을 맡아서 가르치는 일이 흔했던 때라 교사들의 자질이나 전문성이 떨어지는 시기였기에, 고등학교 밴드부와 군악대에서 활동한 게 경력의 전부인 분이 음악 교사로 재직하고, 생물 교사가 영어 과목도 맡고…..이런 일이 많아서 내가 보기에도 어떤 교사의 수준은 3류대학에 다니는 친척 형님보다 나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수업 준비에 힘쓰기보다는 교사라는 권위를 악용하여 학생들을 자신의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삼아 매타작을 일삼는 교사도 적지 않았지만, 그걸 문제 삼는 학부모도 거의 없던, 선생 노릇하기는 편했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그런 시골 중학교에 다닌 내가 그럭저럭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와서 멀리 미국까지 와서 밥 먹고 살았으니 다행스럽다. 까짓 W. C.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어도 그게 뭐 대수인가?
W. C. 또는 Water Closet이라는 표현은 원래 화장실, 특히 수세식 변소를 뜻하는 말로, 주로 영국에서 사용되었지만, 요즈음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구식 표현이며, 대신 Restroom(공공장소에서 주로 쓰이며 가장 일반적인 표현임), Bathroom(가정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공공장소에서도 사용됨)이라는 표현이 일반적이다. 가끔 Washroom(일부 지역에서 사용), Toile(주로 변기 자체를 지칭하며, 공공장소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음). Lavatory(공항이나 비행기 내에서 쓰이기도 함) 등의 표현이 쓰이기도 한다.
화장실을 뜻하는 표현 중에서 내가 가장 멋있다고 생각하는 건 주로 절집에서 사용되는 ‘해우소(解憂所)이다. 참 재미있고 의미 있는 표현인 이 단어는 불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근심(憂)을 푸는(解) 곳(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화장실을 단순히 생리적인 필요를 해결하는 공간으로만 보기보다, 마음의 근심이나 걱정을 내려놓는 장소로 여기는 철학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2025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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